어느 재개발 조합장의 죽음(35) - 매몰비용 청구 소송
어느 재개발 조합장의 죽음(35) - 매몰비용 청구 소송
  • 강정민 변호사/법무법인 영진
  • 승인 2015.06.17 1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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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1일.

안암6구역 추진위원회 사무실 앞 골목길이 시끌벅적하다. 김현수가 ‘안암6재정비촉진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설립추진위원회’ 현판을 떼어 내고 있다. 현판이 걸려 있던 자리가 허옇게 드러난다. 2005년 4월 10일 추진위원회 현판식을 한 지 4년만의 일이다.

김현수가 떼어낸 현판을 옆에 내려놓자 이동호가 '안암6재정비촉진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이라고 쓰인 현판을 건네준다. 김현수가 추진위원회 현판을 떼어 낸 자리에 조합 현판을 걸자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 순간 김현수의 눈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던가?

지금 당장도 직무정지가처분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증거보전신청을 했던 박두수가 김현수를 상대로 직무정지가처분신청을 한 것이다.
조합설립인가를 받는 데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박두수가 구청에 조합설립인가를 내 주어서는 안된다고 강력하게 민원을 제기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새마을금고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는 박두수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도시개발과 직원들이 난색을 표하며 차일피일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현주피엠씨의 민익선 회장은 이런 면에 촉이 밝았다. 재개발에 찬성하는 주민들을 내세워 민원을 제기하게 하더니 며칠 뒤에는 구청에서 농성을 벌이게 했다. 농성은 인가가 날 때까지 이어졌다. 2010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둔 구청장은 연일 계속되는 농성과 주민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뭐? 구청장이 조합설립인가를 내줬다고?”
박두수는 믿을 수 없었다. 지난 선거 때 그렇게 도와줬는데?
박두수는 허탈한 마음을 안고 노평래 변호사를 찾아 갔다.
“가처분은 어떻게 될 것 같아?”
“그게 결국은 표 싸움이잖아. 김현수를 찍은 서면결의서 중에서 무효표가 얼마나 나오는지가 관건인데, 좀 찾아냈나?”

당락은 서면결의서에서 갈라졌다. 창립총회에 참석한 토지등소유자들 중 90% 이상이 서면결의서를 제출했고 직접 투표한 사람은 불과 10%도 되지 않았다. 토지등소유자명부에 직접 출석으로 표시된 숫자와 직접 투표용지 숫자는 문제가 없었다.

“어제 구청장이 조합설립인가를 내줬어. 자네도 알다시피 구청장 당선시키느라 내가 고생을 많이 했잖아?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는지 참 내.”
“행정이라는 것이 처리기한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구청장이라도 어쩔 수 없었겠지. 게다가 동네 사람들이 매일 농성을 벌였다면서?”

박두수의 힘없는 말에 노평래 변호사가 어떻게든 위로해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조합설립을 무효로 만들 방법이 없을까? 요즘 보니까 재개발재건축 소송이 엄청 많던데. 거, 시공사선정결의 무효확인소송 같은 것도 있던데.”
조합을 운영하려면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 조합운영비를 대주는 것은 결국 시공사다. 시공사를 잘라내면 조합은 결국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노변, 방법 좀 찾아줘 봐. 내가 도저히 자존심이 상해서 안되겠어. 수임료는 걱정하지 말고, 아무리 친구라도 확실하게 할 건 확실하게 해야지.”
박두수가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놓는다. 2천만원짜리 자기앞수표다.
“분명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좀 부탁함세. 수임료가 부족하면 이야기하고.”

노평래 변호사는 재건축재개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사건을 다루어 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재개발재건축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는 업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였고 이들에게 사건이 다 몰리고 있었다. 다른 변호사들은 재건축재개발사건을 다루어볼 기회조차 제공되지 않았고 당연히 전문성을 갖추기가 어려웠다.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뭐니뭐니해도 사건을 많이 다루어봐야 하는데,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명색이 변호사인데 친구 앞에서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었다.

‘다른 변호사들도 다 하는 일인데 내가 못할 이유도 없지.’

“이게 지금까지 안암6구역에서 있었던 총회 책자들이야. 처음부터 다 가져 왔으니까, 이걸 보면 지금까지의 추진경과를 웬만큼 알 수 있을 거야. 더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말 만해. 언제든지 대령할 테니까.”

박두수는 노평래 변호사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노평래는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고 공부도 정말 잘했던 친구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그런 친구였던 것이다. 노평래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노평래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말 의외였다. 동창들 사이에서는 대법관까지 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오가는 사왕이었기 때문이다.
노평래는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뒤로는 동창회 모임에 빠지지 않고 나왔고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새마을금고에도 종종 송사가 일어나는데, 박두수는 그때마다 노평래에게 사건을 부탁하였고 노평래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노 변호사 입장에서도 박두수는 좋은 친구이자 고객이었다. 박두수가 다른 새마을금고도 여러 곳 소개해 주어 사무실 유지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박두수가 다녀가고 난 뒤 노 변호사는 노 변호사는 짬짬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재건축재개발 관련 판례들과 현재 제기되고 있는 사건 유형들을 찾아보았다.

재개발재건축 전문서적을 보는 것보다 최신 판례와 현재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실제 사례를 찾아보는 것이 핵심 쟁점을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급박한 상황에서 기초부터 공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변호사가 일반인들과 다른 점은 법률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네비게이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법령과 판례들을 검색, 분석하여 사안에 적용가능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박두수는 ‘시공자선정결의 무효확인소송’이라는 말을 했다. 역시 판례가 있었다.

대법원 2008.6.12. 선고 2008다6298 [시공사선정결의무효확인]
시공사의 선정은 조합총회의 고유권한이라고 봄이 상당하고, 도시정비법 제11조에서 주택재건축사업조합에 대해서만 사업시행인가를 받은 후 시공사를 선정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등의 사정만으로 달리 볼 것은 아니므로, 추진위원회 단계에서 개최한 토지 등 소유자 총회에서 시공사를 선정하기로 한 결의는 무효이다.

노평래는 박두수가 갖다 준 시공자선정총회 책자를 살펴보았다. 안암6구역은 2005년 9월 30일 주민총회를 개최하여 백두건설을 시공사로 선정했다. 추진위원회 단계에서 시공사를 선정한 것이다. 대법원 판례가 있는 이상 분명히 이길 수 있다.

다음에는 조합설립과 관련된 판례를 찾아보았다. 민사소송으로는 조합설립결의무효확인소송, 행정소송으로는 조합설립인가처분취소 또는 무효소송들이 제기되고 있었는데, 2009년 대법원이 관할을 행정법원으로 정리하면서 이후로는 모두 행정소송으로 다뤄지고 있었다.

대법원 2010.1.28. 선고 2009두4845 [재개발정비사업조합설립인가처분무효확인]
재개발조합설립인가신청에 대한 행정청의 조합설립인가처분은 단순히 사인(私人)들의 조합설립행위에 대한 보충행위로서의 성질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법령상 일정한 요건을 갖추는 경우 행정주체(공법인)의 지위를 부여하는 일종의 설권적 처분의 성질을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도시정비법상 재개발조합설립인가신청에 대하여 행정청의 조합설립인가처분이 있은 이후에는, 조합설립동의에 하자가 있음을 이유로 재개발조합 설립의 효력을 부정하려면 항고소송으로 조합설립인가처분의 효력을 다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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