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재개발 조합장의 죽음(끝) - 매몰비용 청구 소송
어느 재개발 조합장의 죽음(끝) - 매몰비용 청구 소송
  • 강정민 변호사/법무법인 영진
  • 승인 2016.01.15 1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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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장님 큰일 났어요. 요것 좀 봐요. 요것이 오늘 아침에 동네에 쫙 뿌려졌당께요.”
김순례가 조합 사무실 문을 급히 열고 들어오면서 호들갑을 떤다.

“뭐간디 아침부터 그란다요?”

김현수의 말에 김순례가 A4 사이즈 한 장짜리 유인물을 김현수에게 들이민다. 돋보기를 쓴 채 신문 기사를 보고 있던 김현수가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안암6구역 조합장 30억 꿀꺽’이라는 고딕체 활자가 대문짝만하게 인쇄되어 있다.

“아니 이게 뭐여?”

김현수가 깜짝 놀라며 유인물을 집어 들고 부랴부랴 살펴본다. 누가 뿌린 것인지 이름도 없다.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것을 우려한 것이리라.

‘도대체 누가 이따위 거짓말을.’

범인은 뻔했다. 박현길이 이끄는 비대위에서 뿌렸을 것이다. 조합원들을 흔들어 조합해산동의서를 받을 심산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근거도 없이 이런 걸 뿌리다니.’

김현수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룸싸롱에서 술을 마신 적은 있다. 업체 사장들이 단합대회 한번 하자고 하도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갔던 것이다. 그런데, 리베이트로 10퍼센트를 받아 먹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철거업체로 선정해 달라면서 리베이트 제안받았던 일이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이었던 김현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것이다.

“조합장님, 이걸 어쩐대요? 집집마다 다 뿌려서 조합원들이 벌써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김순례가 걱정스럽다는 듯 이야기하자 김현수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알기는 뭘 안다는 거예요 시방. 이게 사실이란 말이예요. 택도 없는 거짓말인디 알기는 뭘 알어요?”

“아이고메 깜짝이야 누가 정말이래요? 동네에 쫙 뿌려져서 조합원들이 다 알 것이라는 말이지요.”

김순례가 실수를 알아챈 듯 말꼬리를 흐린다.

“이 사람들이 임원들 집은 쏙 빼놓고 돌린 것 같더라고요. 우리집에도 없었는디 오다 보니까 골목길에 요것이 나뒹굴고 있더라고요.”

기왕지사 일은 벌어졌다.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 주임, 이동호 전화혀서 빨리 들어오라고 해.”

떠오르는 건 이 부장밖에 없다. 이런 일을 많이 겪어봤을 테니 뭔가 대책이 있을 것이다.

조합원 여러분, 심려가 많으시지요. 어제 익명의 찌라시가 뿌려졌습니다. 조합장이 30억원을 꿀꺽했다는 말도 안되는 ‘카더라 통신’이었습니다. 현명하신 우리 안암6구역 조합원님들 중에는 그 말을 믿으시는 분이 없을 줄 압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저는 업체들로부터 일원 한푼 받지 않았습니다. 제 양심을 걸고 맹세합니다. 지금 비대위 쪽에서 해산동의서를 걷느라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찌라시는 해산동의서를 걷기 위한 술책입니다.

변호사에게 알아본 바 이것은 분명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오늘 고소장을 제출할 예정입니다. 검찰 수사를 통해 저의 무고함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아무쪼록 거짓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마시고 자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합이 해산되고 나면 우리 안암6구역은 앞으로 어떠한 비전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 부동산 경기가 안좋다고 하여 당장 사업을 접어서는 안됩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경기가 회복되기를 기다려는 것이 상책입니다. 아무쪼록 신중하고 현명하게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날 바로 조합 소식지가 조합원들에게 발송되었다. 비대위측도 그냥 있지 않았다. 며칠 뒤 일부 뜻 있는 조합원들이 검찰청에 진정서를 접수했다는 찌라시가 뿌려졌고 조합원들 사이에 이런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조합장이 룸싸롱에 가서 접대 받은 기는 사실이라카데. 조합장이 다 인정했다드만. 리베이트도 받아 쳐 묵지 않았을까?’

2012년 11월 1일 오후 안암6구역 조합사무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네. 조합입니다.”

이인임 주임이 전화를 받더니 조합장을 찾는다. 

“조합장님. 구청의 김 주무관님이신데요. 전화 돌려 드릴께요.”

조합장 책상에 놓여 있는 전화벨이 울리자 김현수가 수화기를 집어든다.
주무관과 인사를 나누고 통화하는 김현수의 표정이 점점 싸늘하게 굳어간다.

“해산신청서가 접수되었다구요? 박현길외 477명이라구요?”

“그럼, 이후 절차가 어떻게 되죠?”

한참 통화를 하던 김현수가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침통하기 그지없는 표정이다.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핸드폰을 꺼내들고 9번을 꾹 누른다.

“어, 이 부장, 큰일났다. 해산신청서가 접수된단다.”

2013년 11월 11일 밤 마포대교. 

김현수가 하염없이 흘러가는 한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네온싸인 불빛에 비친 강물이 처량하기 짝이 없다. 모든 것이 김현수를 압박하고 있었다.

업체들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챙긴 것은 민익선이었다. 조합장이 원한다며 업체 사장들에게 돈을 뜯은 것이다. 물론 그 돈은 김현수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닳고 닳은 민익선이 처음부터 조합장을 핑계로 작심하고 돈을 뜯어 먹은 것이다. 업체 사장들도 처음에는 발뺌을 했지만 노련한 검찰 수사관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문제는 민익선이었다. 민익선은 받은 돈을 한푼도 남김없이 조합장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했고 그 과정에서 김현수를 완전히 나쁜 놈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해도 수사관은 민익선의 말을 더 신뢰하는 듯 했다.

내일 마누라랑 검찰청에 들어가기로 했는데 아직까지 말도 꺼내지 못했다. 가뜩이나 몸도 약한 사람인데 그런 말을 들으면 까무라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합장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여자가 바깥 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한다고 윽박질렀던 일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자고로 여자 말 들어서 잘못될 일 없다고 했는데, 그때 왜 그랬는가 모르것네. 뭐가 씌웠던 게지.’

2013년 11월 17일 김현수 조합장의 핸드폰에서 자살 직전에 녹음된 것으로 보이는 녹음 파일이 발견되었다.

여보. 미안허네.
나가 이럴라고 조합장을 헌 것은 아닌디. 어쩌다 봉께 이렇게 되고 말았구만.
나는 떳떳허네. 우리 식구들 욕 안 멕일라고 업체들이 돈을 싸 짊어지고 와도 한푼 받지 않았구만. 다만 술은 쪼까 얻어 먹었네. 하도 술 한잔 허자고 혀서 그랬네.
근디 그게 그렇게 큰 죄가 되드만. 검사 양반이 술 어디서 먹었냐고 캐 묻고 그라는디 심장이 오그라 드는 줄 알았당게.

자네도 알다시피 나가 평생 분필가루 먹느라고 기집 끼고 술 먹어 본 적이 없지 않는가.
근디 조합장 허믄서 그런데도 몇 번 댕겨 봤네. 딸 내미 같은 어린 아가씨들이 나와서 술을 따르고 여기 저기 만져대는디 머리털이 쭈삣쭈삣 서드만. 사주는 술인게 먹기는 먹었는디, 거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영 모르것드라고.

술은 역시 당신이랑 닭발에 소주 먹는 것이 최고여. 소위 말혀서 2차라는 것도 가봤네. 허지만 당신에게 부끄러운 짓은 허들 안혔응께 남사스런 상상은 아예 허들 말어.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뭣이든 엮어 넣을 기세구만. 그리 되믄 손주들 얼굴을 어찌 볼 것인가. 명색이 중학교 윤리 선상님이었는디, 또 제자들은 뭐라고 허겄어.

팔자에 없는 조합장까지 허믄서 잘난 사람들한테 대접도 받아봤고 이 놈의 시상 아무 미련도 없네. 허지만 자네한테는 미안허네. 평생 죽도록 고생만 시키고….
내 먼저 가 있을랑게 천천히 잘 지내다 오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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