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구구식 역사·생활유산 보존행정... 재개발·재건축 멍든다
주먹구구식 역사·생활유산 보존행정... 재개발·재건축 멍든다
서울시 '흔적남기기' 정책에 정비사업장 몸살
  • 김하수 기자
  • 승인 2019.03.12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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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전통산업·노포 보존 위해 세운재개발 전면 재검토
잠실5·개포1·4단지 미래유산 지정에 주민들 원성 폭발 

[하우징헤럴드=김하수기자] 서울시가 역사·생활유산 등 ‘흔적남기기’ 정책을 강행하면서 재건축·재개발현장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지난해 잠실주공5단지, 개포주공4단지를 재건축 역사유산으로 지정, 아파트 일부를 남기라고 권고한 것에 이어 최근 청계천·을지로 일대 정비사업에 대해도 전면 중단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시는 해당 지역의 정비사업에 대한 계획과 보존 원칙 등을 재검토하고, 대책이 마련될 때까지 이주·철거를 중단하고, 인·허가를 진행하지 않겠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라 이미 이주·철거가 진행된 재개발 막바지 단계에 이른 구역마저 사업이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도심전통산업·노포 보존 위해 세운재개발 전면 재검토

서울시는 연초 세운재정비촉진지구(이하 세운지구) 정비사업을 재검토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시는 “세운재정비촉진구역 내 위치한 ‘을지면옥’과 ‘양미옥’ 등 노포(老鋪) 보존을 위해 해당 재개발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고, 올해 말까지 관련 종합대책을 마련한다”고 밝혔다.

다만, 토지보상 및 입주자 이전 협의를 끝낸 세운3구역 내 1·4·5구역은 민간의 사업 진행을 막을 수 없다는 이유로 그대로 공사를 진행키로 했다. 이들 3-1·4·5구역은 지난해 12월부터 철거에 들어갔다. 반면 세운3-2·3·6·7구역에 위치한 을지면옥, 양미옥, 조선옥 등 노포는 강제 철거하지 않도록 중구청과 협력하기로 했다.

공구상가가 밀집한 수표도시환경정비구역(이하 수표구역)은 지난해 12월 사업시행인가를 신청했으나 서울시는 종합대책 마련 전까지 사업 추진을 중단시켰다.

서울시 관계자는 “상인 이주대책이 미흡하고 대단위 도시환경정비사업이 추진되면 철거로 인해 산업생태계 훼손이 우려된다”며 사업 재검토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해당구역 내 영세 토지등소유자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법적 절차에 맞춰 사업을 진행 중이었는데 이제 와서 시가 일방적으로 재개발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법을 넘어선 요구사항이라는 것이다.

3구역 내 한 토지주는 “우리는 평균 15평 내외 토지를 소유한 서민층”이라며 “박시장의 노포 보호 정책으로 을지면옥 등 수백억 자산가들이 오히려 더 큰 이득을 보고, 600여 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이어 “박 시장은 본인이 직접 변경한 2014년 세운지구 재개발 계획을 법적 근거도 없는 생활유산을 핑계로 뒤집으려 한다”며 “사업추진 확정 도장까지 찍어두고 이제 와서 사업을 중단시키면 앞으로 뭘 믿고 사업을 추진하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질적인 피해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3구역 재개발 시행사인 한호건설은 토지주 75% 이상 동의라는 법적 절차를 다 밟고도 연말까지 철거 작업이 중지되면서 매달 20억원의 금융비용을 물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제대로 된 원칙도 없고 법적 구속력도 없는 생활유산이 백년대계인 도시계획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납득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시, 잠실주공5·개포주공1·4 ‘흔적남기기’ 강행… “재건축 시 한 동 남겨라”

이같은 서울시의 흔적 남기기 정책은 재개발구역 뿐만 아니라 재건축단지까지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는 1970~1980년대 지어진 강남구 개포주공1·4단지와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의 재건축 시 1개동을 미래 유산으로 보존하기로 했다. 주거문화의 변천사가 담겨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시는 개포주공4단지 재건축 정비계획안에 건물 일부를 남기도록 했다. 대상지는 단지 내 개포초등학교와 맞닿아 있는 428동으로, 이 건물을 가로와 세로로 잘라 20가구를 남기는 방식이다. 앞서 서울시는 최대 재건축 단지인 잠실주공5단지에도 주민들의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한강변과 가장 인접한 523동을 남기도록 했다.

개포주공4단지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됐다. 40년 가까이 된 아파트의 흔적과 시민들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보존돼야 한다는 판단이다. 이와 함께 정비사업 단계별 영상물도 남기도록 했다. 현재 이주가 마무리된 개포주공4단지의 착공, 준공 과정을 모두 담는다.

이후 해당 아파트 내 조합원들의 반발이 극심하자 당시 시는 강제사항이 아닌 권고·유도차원의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비업계에서는 시의 흔적 남기기 정책이 권고사항이 아닌 사실상 정비단계 인허가를 위한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서울에서도 가장 비싼 땅에 입지한 콘크리트 건축물에 근현대사에 남길 역사적 가치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지 의문”이라며 “향후 재건축 단지의 흔적남기기 사례가 늘어날수록 조합들의 불안감도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실제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아파트라면 서울시에서 매입을 하던 아니면 인센티브를 주고 기부채납을 받아서 아파트 문화유산 박물관을 만들면 되는데 오로지 조합에게만 피해를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비업계, “기준 없는 서울시 흔적남기기 정책 중단해야”

정비업계는 서울시가 주장하는 역사·문화적 보존가치가 높은 지역의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다. 개발을 반대하는 소수의 의견이 역사·생활 문화 보존이라는 명분으로만 활용된다는 것이다. 실제 시가 강조하는 ‘생활유산’의 판단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

시 관계자는 “당시 서울 4대문 내 시민들의 정서가 녹아 있는 오래된 건물과 음식점들을 보존하자는 취지로 생활유산을 지정했다”며 “생활유산은 강제로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운지구 일대 정비사업 중단 사태의 경우 을지면옥, 양미옥 등 노포의 보존 문제로부터 출발했다. 연초 세운지구 재개발 보류안 발표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은 을지면옥 등 노포가 철거되는 것에 대해 몰랐다고 해명한 바 있다.

현행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따르면 정비기본계획을 수립할 때에는 역사적 유물 및 전통건축물의 보존계획 등을 포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기본계획을 수립하기 전 현장조사를 통해 해당 지역에 역사적 유물이나 전통 건축물 등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을지면옥, 양미옥 등이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생활유산’이라면 계획 수립 전에 조사를 통해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만약 이들 노포 등이 철거 대상에 포함됐는지에 대해 정말로 몰랐다면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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