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의 국토이야기>본 대륙침략루트 新作路
<김의원의 국토이야기>본 대륙침략루트 新作路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5.12.07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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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7 17:07 입력
  
 
김 의 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일제가 통치 36년간 건설한 신작로는 2만5천500㎞로서 이에 투입한 금액은 2억1천만엔에 이르렀다.
그들의 초기 도로건설 사업은 정치적 군사적 필요와 중요도에 따라 시행했고, 이어서 경제적 목적을 위한 도로들이 건설되기도 했다.
그들이 우리나라를 통치하는 동안 도로 부문만큼 완전히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분야는 없다. 그만큼 도로건설은 치안 및 군사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합병 직후인 1911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전문 11조로 된 ‘도로규칙’을 제정하여 도로의 등급과 관리기준 등 도로에 관한 제도를 완성했다.
도로의 등급은 1등, 2등, 3등, 등외의 네 종류로 나누었다. 1등 도로는 서울에서 도청소재지, 사단사령부 소재지, 여단사령부 소재지, 요새사령부 소재지, 중요한 개항장 또는 철도역에 이르는 도로와 군사상 중요한 도로, 경제상 특히 중요한 도로로 설정했다.
2등도로는 인접한 도청소재지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 도청소재지부터 관할시청 또는 군청소재지에 이르는 도로, 도청소재지로부터 도내 중요한 지점 항진(港津) 또는 철도역에 이르는 도로, 항진이나 정차장 상호간을 연결하는 도로와 인접도내 중요한 지점, 항진철도역 또는 도로 상호간을 연결하는 도로로 했다.
3등도로는 인접한 시청 또는 군청소재지를 연결하는 도로로 했다.
도로의 시설기준중 폭원은 1등도로 4간(7.27m)이상, 2등도로 3간(5.45m), 3등도로 2간(2.63m)으로 정했다. 당시의 2등도로는 지금의 국도에 해당하는 수준이었음에도 1등도로만 2차선이 확보되고 있었다.
일제는 1917년에 1만3천㎞의 도로를 건설했는데 이 당시 우리나라의 자동차 등록대수는 114대에 불과했다. 즉 일제가 도로를 서둘러 건설한 목적은 일반적 차량통행이 아닌 다른데 있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에 광화문 앞에 있던 도로원표를 세종로 네거리로 옮겨놓고 신작로 건설을 통하여 착취를 위한 공간체계의 완성에 열을 올렸다.
왕조시대 우리나라의 도로상태는 수준이하였다. 1917년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농촌에는 손수레처럼 짐을 실어 나르는 수하차(手荷車)가 거의 없었을 정도로 도로상태가 수준이하였다.
이 무렵 어느 지역에서 신작로가 개통되었을 때 총독부에서 파견된 한 관리가 “도로개통으로 많이 편리해졌지요?”라고 물으니 “둘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얘기하면서 걸을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의 초기 도로사업은 만주와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대륙 침략루트’형성에 영향을 받아 군사목적과 치안유지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45년 독일인 라우텐사하는 그의 저서 ‘코리아’에서 <조선의 도로는 대체로 1907년에서 1912년 사이에 건설되었다>고 전제, 모든 도로가 군사적 목적만으로 건설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어쨌든 총독부가 건설한 신작로는 남북을 연결하는 종관(縱貫)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들이 진실로 우리 민족의 교통편의나 산업개발을 염두에 두었다면 동서를 연결하는 도로 몇 개쯤 건설했어야 한다.
하지만 일제의 초기 도로사업은 우리 민족의 교통편의나 산업개발이 아니다. 어느 지역에 민란이나 폭동이 났을 때 이를 진압할 군대, 경찰, 헌병을 신속히 투입할 수 있을 차선만 확보하는 이른바 치안유지가 주목적이었다.
이렇다보니 보통 2차선으로 건설됐던 1등도로도 역사상 민란이나 반란이 심한 지역의 1등도로는 그 노폭을 1차선으로 줄여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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