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재개발 조합장의 죽음(46) - 매몰비용 청구 소송
어느 재개발 조합장의 죽음(46) - 매몰비용 청구 소송
  • 강정민 변호사/법무법인 영진
  • 승인 2015.12.23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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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정책이 도입되자 전국비대위연합회는 쾌재를 불렀다. 재건축·재개발을 저지할 수 있는 공식적인 방법이 생겼기 때문이다. 연합회는 즉시 조합설립동의서 양식을 변형하여 ‘조합해산동의서’ 양식을 만들어 배포하기 시작했다.

일선 현장 비대위 사무실에도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정부가 재건축·재개발의 폐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비대위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토지등소유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미분양 아파트가 넘쳐 나고 있습니다. 별의별 방법으로 미분양아파트를 처리하려고 하지만 팔리지가 않습니다. 급기야 공사대금을 대물로 처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조합마다 추가부담금 때문에 난리입니다. 집집마다 수천만원씩 더 물어내야 한단 말입니다. 지금 재개발하다가는 다 죽습니다. 조합 해산만이 살길입니다.”

재개발·재건축 구역마다 이런 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안암6구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안암재정비촉진지구 9개 구역 전체에 비대위가 구성되고 연합회가 만들어지더니, 신속한 사업추진을 요구하며 시공사 선정총회에 열을 올리던 안암6구역 조합원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뉴타운 해제를 부르짖고 있었다.

“박현길이 조합해산동의서를 벌써 솔찬히 걷은 것 같다고 헙디다.”

김현수 조합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운을 띄우며 민익선 회장의 얼굴을 쳐다본다.

안암6구역 비대위 위원장은 박현길이었다. 박두수를 지지하며 창립총회 당시 이사로 출마했다가 떨어지고 난 후 박현길은 매사 조합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시공사 선정 총회 때에도 한라건설을 밀며 혼란을 조장했었다.

조합 집행부에 비판적인 박현길은 자연스럽게 재개발 반대 주민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타고난 수완을 발휘하여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50프로 걷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가요? 우리가 지금까지 동의서를 한두 번 걷어 봤습니까?”

민익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박현길은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조합해산동의서를 걷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너희들이 나를 제껴놓고 재개발을 할 수 있나 보자.'

악에 바친 박현길은 아예 판을 깨버릴 생각이었다.
‘그래 이번 기회에 조합 해산시켜서 시공사고 뭐고 다 물 멕여 버리자고.’

“석관2구역 어떻게 되었는지 얘기 들으셨죠? 작년에 관리처분총회 하려다가 무산됐잖아요? 평당 7백만원밖에 안 쳐줬답니다. 우리도 그짝 나지 말란 법이 어딨습니까? 다행히 이번에 국회에서 출구정책을 만들었습니다. 여기 조합해산동의서에 싸인하시면 됩니다.”

반응은 좋았다. 토지등소유자 950명의 과반수, 476장 이상 걷어야 하는데 두어 달만에 벌써 200장 넘게 받은 것이다.

마침 도정법 17조가 바뀌어서 동의서 받기도 수월했다. 예전에는 인감도장을 찍고 인감증명서까지 받아야 했는데 이제는 자필 서명을 받고 지장 찍고 신분증 사본만 받으면 끝이다. 신분증 사본도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은 다음에 한꺼번에 출력하면 끝이었다.

제17조(토지등소유자의 동의방법 등) ① 제4조의3제1항제4호, 제7조제1항, 제8조, 제13조제2항, 제14조제4항, 제16조제1항부터 제3항까지, 제16조의2제1항, 제26조제3항, 제28조제7항, 제33조제2항에 따른 동의(동의한 사항의 철회 또는 제8조제4항제7호·제13조제3항 및 제26조제3항에 따른 반대의 의사표시를 포함한다)는 서면동의서에 토지등소유자의 지장(指章)을 날인하고 자필로 서명하는 서면동의의 방법으로 하며, 주민등록증, 여권 등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신분증명서의 사본을 첨부하여야 한다. 다만, 토지등소유자가 해외에 장기체류하거나 법인인 경우 등 불가피한 사유가 있다고 시장·군수가 인정하는 경우에는 토지등소유자의 인감도장을 날인한 서면동의서에 해당 인감증명서를 첨부하는 방법으로 할 수 있다. 〈개정 2009.2.6., 2012.2.1.〉
 
당초 박현길은 비대위연합회에서 배포한 해산동의서 양식으로 조합원들을 찾아다니며 해산동의서를 받고 있었다. 2월 중순부터 몇 달 동안 고생고생해서 동의서를 받았는데 그만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성북구청에서 조만간 서울시 조례로 해산동의서 양식이 만들어 질 예정이니 그 양식이 나오면 그것으로 걷으라는 것이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조합과 정비업체에서 구청에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 구청 담당자에게 악까지 써가며 따져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깝지만 할 수 없었다.
‘그래봐야 잠깐 늦어질 뿐이다.’

드디어 2012년 7월 30일 서울시정비조례가 개정되었다.

서울특별시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조례 제15조의2(조합 설립인가등의 취소)
③ 조합 해산을 신청하려는 자는 별지 제3호 서식의 조합 해산 신청서에 다음 각 호의 서류를 첨부하여 구청장에게 제출하여야 한다.(신설 2012.7.30)
1. 조합 설립에 동의한 조합원 명부(조합 설립에 동의한 조합원 과반수가 해산 신청하는 경우에 한정한다)
2. 조합 해산에 동의한 토지등소유자의 명부
3. 별지 제4호 서식에 따른 해산 동의서

박현길은 조례가 공포되자마자 구청 직원을 찾아가 해산동의서 양식을 달라고 재촉했고 양식을 받자마자 조합원들을 찾아다니며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비대위 회원들도 열심이었다. 당초 생계를 이유로 재개발에 반대하던 사람들인지라 조합을 해산시킬 수 있다는 말에 만사 제쳐놓고 매달리는 형국이었다.

박원순 시장은 ‘서울시내에 아파트만 들어서서는 안된다. 전통적인 마을 형태도 보존되어야 한다’면서 가로정비사업 등 새로운 형태의 정비사업을 권장하고 있었고 실태조사 등 재건축재개발을 억제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각 구마다 최소한 2군데씩은 의무적으로 구역해제시키라는 밀명이 떨어졌다는 말이 나돌고 있었다.

“재개발을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도로를 넓히고 공원도 만들 수 있습니다. 굳이 우리 돈 들여서 재개발하는 것보다는 서울시 보조를 받아 집을 개량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뉴타운에서 해제되면 행위제한이 풀리기 때문에 빌라도 신축할 수 있습니다.”

빌라업자들도 지주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뉴타운에서 해제되면 빌라 신축이 가능해지고, 빌라를 분양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 조합해산에 동의하라는 것이다.

전철역 근처 주민들도 뉴타운 해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뉴타운에서 해제되고 역세권 시프트 사업을 하면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매몰비용을 걱정하는 조합원들도 많았다.

“조합이 해산되면 그동안 쓴 돈은 어떻게 된대요? 우리가 물어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비대위연합 자문 변호사들 말을 들어보면 조합원들이 책임질 일은 없다고 합니다. 돈은 조합이 썼지 조합원들이 쓴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니 그래도 조합이 쓴 돈은 결국 조합원들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만에 하나라도 시공사가 돈 내놓으라고 소송이라도 걸어오면 어쩐다요?”

“아이고 걱정도 팔자시네, 그런 걱정일랑 붙들어 매 놓으랑께요. 시공사들이 지네 회사 홍보하느라고 1년이면 돈을 수백억씩 쓰는데 조합원들 상대로 그런 소송 허것어요. 회사 이미지가 얼마나 나빠지는데. 면목3-1구역은 지난 7월 달에 조합해산총회를 했는데 시공사가 빌려준 돈 안받겠다고 했잖아요.”

“그려. 듣고봉께 그 말도 맞네 그랴. 빈대 잡으려다 초가 삼간 태운다는 말도 있잖여.”

과반수는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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