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의 국토이야기>왜 수력조사 서둘렀나?
<김의원의 국토이야기>왜 수력조사 서둘렀나?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6.02.22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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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2 11:20 입력
  
 
김 의 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대륙진출에 열을 올리던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에 주둔하고 있는 1백만명의 관동군 보급을 일본 본토에서 조달했다. 그러다보니 막대한 수송비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여기서 그들이 처음 생각해 낸 것이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해저철도로 연결하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일본의 철도는 협궤(挾軌)인데 반하여 조선의 철도는 광궤(廣軌)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군수물자를 실은 기차가 그냥 만주까지 달릴 수가 없었다.
이에따라 일제는 부분적으로 조선을 공업화할 필요를 느꼈다. 1923년 3월 총독부 체신국에 임시수력조사과를 설치하고 제2차 수력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에는 8년간에 걸쳐 30만엔이라는 방대한 조사비를 투입됐다.
2차 수력조사에서 밝혀진 수력지점은 150개소였고 발전 추정량은 220만㎾였다. 이처럼 조선에서의 수력발전의 가능성이 나오자 일제는 1929년경부터 조선의 통치방침을 일부 수정한다. 종래의 ‘영원한 농업국가’로 통치한다는 정책에서 ‘남농북공(南農北工)’정책으로 바꾼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제1단계로 압록강수력의 개발을 본격화하는 한편 함흥∼흥남지역, 청진지역, 평양∼진남포지역, 신의주∼다사도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군수공업단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일제는 1936년부터 해방 때까지 제3차 수력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의 정식명칭은 ‘전력통제자료조사’라 하였다.
이 조사의 배경은 1931년의 만주국 탄생으로 일본과 만주 두 나라의 산업공동개발 기운이 대두된데다 높은 댐을 축조하는 토목기술이 진보한데 따른 것이었다.
이 때의 조사는 국경하천인 압록강과 두만강이 주대상이었으나 우리나라 큰 하천의 중·하류부에 대한 큰 댐 발전방식의 조사 등도 이루어졌다. 이 3차 수력조사에서 밝혀진 우리나라의 포장수력은 644만㎾였고, 수력지점의 수는 154개소였다.
다행히 우리나라에는 높은 댐 축조에 적합한 장소가 많았고 서북지방과 삼남지방의 하천은 구배가 완만해서 같은 100m 댐이라도 저수지의 용량을 크게 늘릴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수력개발에서, 특이한 국토와 자연조건, 강우특성 등을 교묘하게 변용하고 활용하여 창출한 것이 바로 이 큰 댐(High Dam)방식에 의한 대용량 저수지 방식과 대저수지를 갖는 유역변경 방식이다.
대용량저수지 방식의 댐은 수풍(水豊)이 그 대표적인 것이고, 유역변경방식은 장진강발전소와 부전강발전소가 대표적인 것이다.
1차수력조사(1911∼1914년)에서 전국의 수력이 5만7천㎾에 불과했던 것은 개발방식에서 일본과 같은 수로방식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2, 제3차 조사의 결과 100배 이상의 발전력을 얻어 우리나라가 일약 수력자원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개발방식의 전환 때문이었다.
어쨌든 해방당시 일본은 우리나라 포장수력의 27.1%에 해당하는 174만4천800㎾의 수력을 개발했다. 이미 개발된 29개지점 외에 당시 공사중이었던 곳이 10개지점이었고 발전량은 134만6천700㎾였으며, 이는 우리나라 포장수력의 20.9%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1945년 현재 전포장수력의 48%가 개발되었거나 개발중에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포장수력자원의 80% 이상이 북한에 편제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개발되었거나 개발중인 수력발전소의 거의 대부분도 북쪽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와같은 수력에너지의 북부 편재가 일제로 하여금 ‘남농북공’정책을 펴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하자원 같은 것이 남쪽보다 북쪽에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에 의한 남농북공 정책은 그후 해방과 더불어 양단된 남북간에 전력공급의 심한 불균형을 노정시켰고, 단전 등 비극적인 운명으로 치닫는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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