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의 국토이야기>故 신형식 선생을 생각한다
<김의원의 국토이야기>故 신형식 선생을 생각한다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8.12.10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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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0 12:26 입력
  
김의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토지공개념제도의 토지공사, 국토연구원을 설립, 우리나라 건설행정에 큰 이정표를 남긴 신형식 선생이 건설부장관으로 취임한 것은 1976년 12월 4일이다. 중앙정보부장으로 영전한 김재규의 후임으로 12대 건설부장관이었다.
 

취임 1년여전인 1975년 제1 무임소장관때 선생은 국정의 암적 존재인 ‘수도권 인구분산 계획’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만약 그때 이 계획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서울은 완전히 패닉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형식 선생은 5·16혁명후 1963년 6대 국회의원 선거때 고향인 전남 고흥에서 당선의 영광을 입어 정계에 진출했다. 정치학을 공부한 사람답게 제대로 진로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1967년에 있은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때 낙선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다. 정계 관측통들의 말에 따르면 강직한 성품의 선생은 평소 대통령을 둘러싼 고위참모들의 퇴진을 요구했다 한다. 이로 인해 선생은 실력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선거구의 서민호 문제들이 얽혀 있었다한다.
 
의석을 잃은 선생은 호구지책으로 조그마한 사업을 시작했으나 뜻대로 되질 않았다. 실의에 찬 선생은 인생을 포기할 결심을 했다. 고인의 말에 의하면 “소주 한박스쯤 마시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명은 재천이라고 소주 40병을 마시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선생은 1969년 국정교과서 사장으로 취임했다. 물론 박대통령의 배려였다.
 
1971년 8대 국회에서는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의 대변인이 되었다. 지금도 정당과 언론계에서는 정당의 명대변인하면 선생을 꼽는다 한다.
 
이 시절 선생은 다른 사람들처럼 앵무새 같은 대변인 노릇을 하지 않았다. 비밀에 속하는 사항(오프 더 레코드)도 “어차피 알게 될 것”하시면서 내용과 배경까지 속시원히 말해버리고는 며칠까지만 보도를 유보해 달라는 식이었다. 선생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기자들은 선생을 가리켜 ‘가장 좋은 취재원’이라 했고 ‘자이언트(거인)’란 별명을 붙였다. 몸도 크지만 ‘통이 크다’는 뜻일 게다.
 
1973년 9대 국회에서는 재무위원장을 지냈고 1976년에는 공화당의 정책위 부위원장겸 정책연구실장직을 맡았다. 1976년 10대 국회에서는 4선의원의 관록답게 집권여당의 사무총장직에 오름으로써 정계의 핵심인물로 자리를 굳혔다.
 
건설부장관으로 취임하자 선생은 정책의 기둥을 ‘토지공개념의 확립’과 ‘해외건설’의 두 가지로 압축했다. 토지공개념은 국민경제 발전을 위한 장기적 안목이었고 해외건설은 당면한 경제적 애로타개가 그 목적이었다. 상공회의소나 경제인연합회 등에서 토지투기를 개탄하면서 앞으로 토지공개념제도의 확립 없이는 우리 경제의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고 역설하자 기업측과 언론에서는 우리의 경제체제를 사회주의 방식으로 바꾸자는 것이냐고 물고 늘어졌다.
 
공개념이라고 하니까 성급한 사람들이 ‘토지의 국유화’로 오해한데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급기야는 박대통령에게 불려가 해명아닌 설명을 한 일도 있었다.
 
선생은 토지공개념을 밀고 나가자면 공영개발의 주체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 재무부산하에 있던 토지금고(土地金庫)를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오늘의 토지공사(당시 토지개발공사)로 개편하여 건설부산하로 가져왔다. 또한 선생은 토지공개념이나 국토계획, 도시계획, 주택문제 등 산적한 정책과제의 합리적 추진을 위해서는 두뇌집단이 필요하다면서 국토개발연구원(현 국토연구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듯 선생은 2년이란 재임기간에 굵직굵직한 건설행정의 이정표적인 업적을 남겼다.
 
선생의 친화력은 유별나다. 국장을 부를 때도 아무개 국장이라고 부르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이공 혹은 이형, 박형으로 통했고 심지어 과장을 보고 노선생이라고 한적도 있었다.
 
선생은 오랜 정치생활에서 행정부로 옮겨온 후 새로운 경지를 발견한 것 같다. 국장들과의 회식때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나는 여태까지 정치가 만능이라고 생각했다. 행정은 정치의 아들인줄 알았는데 행정부에 와 보니 정치가 행정의 아들이더라” 하시면서 “진짜 애국자는 공무원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청와대 모수석비서관이 장관실에 와서 모국장을 인사조치하는 것이 어떻냐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은 “그것이 어른 뜻이냐”고 물었다. 비서관은 대답을 못했다. 그러자 벼락같은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사람아 대통령의 뜻이라면 도리가 없어. 그러나 이것이 당신 생각이라면 나는 못해. 내가 장관이야. 당장 돌아가시오”하자 수석비서관은 총총걸음으로 장관실을 빠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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