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의 국토이야기>역사 記述의 기준은 뭔가
<김의원의 국토이야기>역사 記述의 기준은 뭔가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8.10.01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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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1 15:54 입력
  
김의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정치인들이 무슨 일을 하려다가 반대에 부딪치거나 정치무대를 떠날 때 흔히 “후일 사가(史家)들의 평가에 맡기겠다”는 말을 쓴다.
 

이승만 박사와 장면 총리가 이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이 말을 자주 쓴 것으로 기억한다. 전두환씨와 노태우씨도 이 말을 애용했다.
 

이 말은 특히 동양의 전제(專制)사회에서 많이 쓰여 진다. 동양과 서양은 역사의 편찬 방법이 다르다. 서양의 역사는 ‘시민의 역사’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국민들의 투쟁사인 동시에 국민의 손에 의해 쓰여 졌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기록하되 평가는 말라
 

이에 반해 동양의 역사는 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의 역사인 동시에 역사의 기록도 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동양의 역사는 민중들의 입장이 반영되지 않은 지배자 중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했다. 뜻인즉 역사는 있는 대로 서술할 따름이지 억지로 갖다 붙이지 말라는 말이다. 정직하게 기록은 하되 평가는 하지 말하는 뜻도 된다.
서양의 카(E.H.CARR)란 역사학자도 공자와 비슷한 말을 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역사는 시시비비로 나가야지 열닷냥 금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이란 흑백논리를 피하라”고 했다. 시시비비! 좋은 것은 좋은 것, 나쁜 것은 나쁜 것으로 기록하라는 뜻이다.
 

현대 역사학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사회와 문화 등의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것을 중심과제로 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있었던 것처럼 집권층 사가들에 의해 역사가 꾸며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가들은 역사 기술에 있어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 시대의 주요 이슈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시대의 시대적 사명이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이를테면 박대통령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5·16혁명 후 그가 당면한 일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남북통일과 민주화, 가난극복을 위한 경제발전이 그것이었다.
 

이 세 가지 시대적 소명을 얼마나 충실히 이행했느냐 하는 것이 판단의 잣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남북통일을 하재도 1인당 GNP 83달러 수준에서는 말의 씨가 먹혀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당시는 1968년까지 북쪽이 우리보다 경제가 앞서있었으니 더욱 말이 아니었다. 민주화도 마찬가지 여건이었다. 밥도 못먹는 판에 어떻게 민주화가 가능했겠느냐 말이다. 그러니 대통령으로서는 남북통일과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기본조건을 경제개발로 판단한 것 같다. 이 판단은 옳았다. 어느 정도 경제가 발전해야 가난을 탈피할 수 있고 통일접촉도 북쪽에 대한 발언권이 강해질 것이고 민주화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적 자립을 이룩할 때까지 통일문제와 민주화는 꼭 이룩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보다는 경제개발을 우선 시켜야 하겠다는 판단하에 국정을 이끌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역사 기술의 둘째 기준은 지금의 시각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그 시대의 논리에 따라 풀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50년, 100년 아니 300년이나 500년 후라 할지라도 그 시대의 정황에 기초하여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보면 5공과 6공은 사정이 달라진다. 경제개발은 어느 정도 달성했으니 경제개발 대신에 부정과 부패 근절이 새로운 요건으로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전대통령이나 노대통령을 평가하는 잣대로 남북통일과 민주화, 그리고 부패척결에 얼마만큼 노력했느냐는 것이 평가기준이 되어야 한다.
 

역사에는 정사와 야사가 있기 마련
각설하고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지만 역사에는 정사(正史)와 야사(野史)가 있기 마련이다. 삼국사기는 정사이고 삼국유사는 야사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김부식에 의해 편찬되었다. 고려사는 조선시대 세종때 정인지가 편찬했다. 이조사는 아직 편찬도 안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역사편찬의 유력한 하나의 자료이지 정사는 아니다.
역사를 기술하는 데는 그야
 
말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중국의 명나라 역사는 청나라가 정리했다. 청이 망하자 손문과 장개석의 중화민국이 청사를 편찬했는데 그 이름을 ‘청사고’라 했다. 고(稿)란 원고(原稿)란 뜻인데, 말하자면 초안에 불과하다는 겸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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