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지리-- 황제 2명 배출한 '대원군' 아버지의 묘
고제희의 풍수지리-- 황제 2명 배출한 '대원군' 아버지의 묘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8.04.23 03: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8-04-23 17:50 입력
  
왼쪽청룡이 묘를 향해 공격하니 우환 부르고
백호쪽은 청룡을 압도하니 부인들 주장 드세
 
 

고제희

대동풍수지리학회 대표이사
(19)황제 2명 배출한 '남연군의 묘'
 
세도정치 아래에서 기인 노릇을 하며 몸을 감추고 있던 이하응(李昰應)은 당대의 풍수가(風水家) 정만인(鄭萬仁)에게 앞일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차령산맥 중에서도 명당(名堂)이 많은 가야산(伽倻山)을 가리키며,“덕산 땅에 만대를 거쳐 영화를 누릴 곳과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가 있는데, 부친의 묘를 그 곳으로 이장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이하응은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에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묘를 쓸 명당에는 가야사(伽耶寺)라는 절이 있었고, 봉분을 모셔야 할 자리에는 석탑이 있었다. 그러자 이하응은 권세를 이용하여 1840년 가야사를 불태우고, 석탑을 부순 뒤 경기도 연천(漣川)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 곳으로 이장하였다. 당시 상여를 옮길 때 길 도중에 있던 마을 주민들이 번갈아 가며 상여를 메었고, 상여를 운반하였던 마지막 마을인 광천리 주민들에게 상여를 선물하였다. 이 상여는 오랫동안 마을의 상여로 쓰이다가 1974년 중요민속자료 31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각(閣)속에서 보호받고 있다.
 
남연군(南延君, ?∼1822)은 이름이 구(球)고 인평대군의 6대손인 이병원(李秉源)의 아들이다. 은신군(恩信君)에게 입양되어 남연군에 봉해지고, 수원관(守園官)과 수릉관(守陵官)을 지냈다. 12세에 모친을, 17세엔 부친을 여읜 힘없는 왕족에 불과하였던 이하응은 기인 행세를 하며 자신을 보호하였다.
 
그러던 중 조대비의 후원을 얻어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1863년 12세의 나이로 고종(高宗)으로 등극하자 그는 임금의 아버지인 대원군(大院君)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 등을 파견한 밀사 사건에 고종이 연루되어 손자인 순종(純宗)이 황제에 등극하니, 아들과 손자가 2대에 걸쳐 황제에 오른 것이다.
 
묘 이장을 통하여 아들을 왕위에 올린 흥선대원군은 꿈에도 그리던 권력을 한 손에 쥐고 개혁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당시 정세는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열강들의 통상 압력이 거세게 몰아쳐 조선은 사면초가의 입장에 몰려 있었다.
 
남연군의 묘는 독일 상인 오폐로트의 ‘분묘 도굴 사건’으로 역사적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1868년 4월 21일밤 오폐로트는 기선 차이나(China)호를 빌어 타고 상하이를 출발하여 아산만에 도착하였다. 이 배에는 오폐로트를 비롯한 서양인 8명, 말레이지아인과 중국 선원 그리고 약간의 조선 천주교도가 타고 있었다. 이들은 몰래 남연군묘에 도착하여 도굴을 하였다. 그러나 묘가 견고하고, 썰물 시간에 쫓기자 그들은 도굴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 사건은 묘속에 부장된 유품을 도굴하여 그것을 미끼로 천주교 신앙과 통상 자유 약속을 얻어내려는 얕은 수작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조상의 묘를 중히 여기는 조선에서 분묘를 도굴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며, 이 사건은 권력을 한 손에 장악한 대원군의 분노를 사 더욱 쇄국을 강화하고 나아가 천주교도를 박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온천 지역이 아닌 덕산(德山)에서 가야산(伽倻山, 678m)쪽으로 가면 덕산면 상가리가 나온다. 이 곳 상가리는 남연군의 묘를 이장할 때 사용한 상여를 보관하고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붙여진 땅 이름으로 추측되며, 가는 길은 좁은 비포장 도로이다.
 
남연군의 묘는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데, 묘비가 묘 아래쪽에 서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근처에는 보덕사(報德寺)가 있다. 이 절은 수덕사(修德寺)의 말사로 서원산(書院山) 남쪽 기슭에 있는데, 1871년 고종이 가야사를 승계하여 세운 절이다. 가야사에는 금탑(金塔)이라 불리는 철첨석탑(鐵尖石塔)이 있었는데, 이 탑은 사면에 감실을 두고 부처님을 봉안하였던 빼어난 탑이었다 한다.
 
그러나 이 절터가 왕손을 낳게 한다는 풍수설에 의하여 흥선대원군이 절을 불태우고 부친의 묘를 쓰자, 뒤에 왕에 오른 고종이 그 은혜를 고맙게 여겨 절을 새로 짓고 이름을 보덕사(報德寺)라 하였다.
 
묘는 높은 구릉 위에 있는데 묘로 오르는 계단은 흙을 계단처럼 깎아서 만든 것으로 잡초가 나 있다. 묘에서 바라보면 덕산을 비롯한 삽교, 예산의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오고, 동남향으로 탁트여 있어 가슴속까지 시원하다.
 
이 곳의 형승에 대한 풍수가의 의견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소백산을 조산(祖山)으로 하여 속리산을 거쳐 차령, 청양의 백월, 홍성의 대월산으로 이어져 가야산이 만들어지고, 이어 그 줄기는 북쪽으로 뻗다가 몸을 돌려 가야산을 다시 돌아보는 가운데 한 맥이 서쪽(酉辛)으로부터 내려와 만든 명당이라고 지적한다.
 
또 방향은 남동향(亥坐已向)이고 물 줄기는 동쪽에서 나와 남동쪽으로 막히니(卯得辰破), 혈(穴)로 들어오는 용(龍:석문봉)의 좌우에는 가야봉이 천을(天乙)이 되고 옥양봉이 태을(太乙)이 되어 각각 혈을 호위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더불어 오른쪽의 백호(白虎)는 금성과 목성의 산들이 연이어 뻗어 혈을 감싸고 수구를 막고 있는 반면, 청룡(靑龍)쪽은 목성의 산들이 서로 이어져 역시 수구를 막아주고 있다고 평한다.
 
특히 이 곳의 형승은 한마디로 용장호단(龍長虎短)의 형세로 앞 산들은 마치 만조백관이 절하는 모양 같으니 왕(王)의 자리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몽둥이(杖)같은 왼쪽 청룡이 묘를 향해 공격하는 듯 머리를 내밀고 있어 후손에게 피를 부르는 우환(血光之患)이 있을 것이고, 백호쪽은 각각의 모습이 뛰어나 청룡을 압도하니 부인들의 주장이 드셀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구릉 위에 높이 모신 묘는 둥글게 낮은 호석을 두르고 그 앞에는 장명등과 묘비를 두었다. 묘비의 비문은 묘 아래의 묘비와 동일하고 장명등은 지극히 화려하다. 마치 이천의 김병기묘에 설치된 장명등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서양 궁궐의 지붕 모양을 본뜬 옥개석이 특이하고, 화창은 둥글게 사방으로 내었다.
 
그러나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망주석이다. 보통의 망주석은 아래 부분을 땅에 묻는데, 이 망주석은 간주석을 갖춘 기단 위에 높이 서 있으며 그 모양과 위용이 대단하다. 군데군데 바위가 땅 속에 묻혀 있어 옛 절의 흔적을 보여 주며, 석양은 이끼가 끼어 고태가 흐른다. 
 〈대동풍수지리학회 02-3473-9763〉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