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재개발 조합장의 죽음(19) - 매몰비용 청구 소송
어느 재개발 조합장의 죽음(19) - 매몰비용 청구 소송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14.10.1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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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30일 시공사 선정총회장.


총회가 개최되는 안암예식장 앞에서 백두건설과 장백건설 직원들이 열렬한 홍보전을 벌이고 있었다. 어깨띠를 두른 양 건설사의 홍보도우미들이 열을 지어 서서 토지등소유자들이 나타날 때마다 90도로 인사를 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었다.


“백두건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장백건설입니다.”


입장하는 토지등소유자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대한민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건설회사가 안암6구역을 수주하기 위해 경쟁하며, 자기 회사를 뽑아 달라고 매일 전화하고 집으로 찾아와 온갖 감언이설을 뱉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 총회에 출석하면 기념품으로 최고급 밥솥까지 받을 수 있었다. 어느 회사가 선정될지는 모르지만 선정된 회사가 선물로 주는 것이란다.


“자 그럼 제2호 안건 공동시행자 선정의 건에 대한 투표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총 출석 토지등소유자 480명 중 기호 1번 백두건설 305표, 기호 2번 장백건설 150표, 기권 및 무효 25표로 기호 l번 백두건설이 공동시행자로 선정되었음을 의장께 보고드립니다. 의장께서는 안암6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의 공동시행자로 백두건설이 선정되었음을 선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안암6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의 공동시행자로 백두건설이 선정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탕! 탕! 탕!


열흘 뒤 제6차 추진위원회의가 개최되었고 시공사와 체결할 공동시행약정서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삼일 뒤 공동시행약정이 체결되었다.


공동시행약정서에 도장이 찍히는 순간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백두건설의 박남진 과장이었다.


박 과장에게 안암6구역을 소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민익선이었다. 민익선과 박남진은 이미 잘 아는 사이였다.


민익선은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현주피엠씨가 진행하는 현장 중에 백두건설이 시공사로 선정된 곳이 두 곳 있었는데, 민익선은 사업소 소장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북부사업소 넘버 2였던 박남진 또한 소장의 소개로 민익선을 접하게 되었는데 왠지 모르게 잘 통했다.


민익선의 나이가 더 많았지만 민익선은 나이를 따지지 않았고 스스럼없이 대해 주었다.


박남진이 민익선을 만날 무렵 골프를 배우고 있었다. 건설쪽 일을 하려면 골프를 배워두어야 한다는 선배의 충고에 따라 회사 근처 실내연습장을 끊어 레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박 과장, 골프 배운다고. 그래 머리는 얹었나?”


“아뇨. 이제 시작했는데요. 아직 한참 멀었어요.”


“골프는 말이야 실전을 해 봐야 늘어. 연습장에서 백날 쳐봐야 늘질 않는다니까? 마침 잘 됐네, 이번 주 토요일 운동하기로 했는데, 나랑 같이 가지? 내가 머리 얹어 줄게.”


두 번째 만나던 날, 끝까지 술자리에 남아 있던 박 과장에게 얼큰하게 취한 민익선이 한 말이었다.


민익선은 변죽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느덧 친한 동생 대하듯 말을 놓고 있었지만 싫지 않았다.


민익선은 이후 한 달에 두 번 정도 주말에 박남진을 불렀다. 민익선과 같이 나오는 사람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설계업체나 도시계획업체, 감정평가사, OS업체 등 주로 재건축재개발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민익선은 월급쟁이가 무슨 돈이 있냐며 계산은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다. 다만 내기가 없으면 골프가 시시하다며 내기는 해야 된다고 했다.


핸디는 두둑했다. 민익선은 박남진이 초보 라는 이유로 동반자들에게 20점씩 핸디를 주자고 했는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기는 보통 타당 만원, 이만원이었다. 한 사람당 20만원씩 핸디를 받으니 60만원이나 되었다.


핸디를 받고 나면 지갑이 불룩해지고 마음까지 든든해진다. 하지만 한 홀, 한 홀 지나면서 지갑이 홀쭉해지기 시작한다. 민익선은 어떻게 알았는지 지갑이 바닥날 것 같으면 살짝와서 돈을 건네 주곤 했다.


“잘 쳐. 힘 빼고,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어. 내가 많이 땄으니까 핸디 좀 더 줄게.”
박남진에게 민익선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익선이 안암6구역을 수주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박 과장, 나 안암6구역 수주했어. 나중에 시공사 선정할 때 백두도 끼워줄 테니까 잘 해봐. 일반 분양분이 많아, 사업성이 좋아서 회사에서도 좋아할 거야.”


백두건설 북부사업소가 주로 하는 일이 바로 현장 수주 및 관리업무였다. 박 과장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만 같았다. 민익선은 재건축·재개발 현장에 대해 빠삭했다.


어느 지역이 어떤지, 사업성은 얼마나 되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이런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얼마전 도시정비법이 개정되어 시공사 선정시기에 대한 제한이 없어지면서 건설회사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수주물량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아파트 시장이 호황을 맞으면서 재건축,재개발은 주택사업부에 있어서 최고의 시장으로 각광받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민익선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박 과장, 시공사 선정시기 앞 당겨진 것 알지. 내가 안암6구역 수주했다고 이야기한 적 있지. 여기 시공사 선정하려고 하는데 자기네는 참가할 생각 없나?”


박 과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이럴수록 냉정해져야 하는 법. 덤덤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저번에 이야기 했던 것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 사업성은 좋나요?”


“야. 박 과장, 나 몰라. 내가 사업성 없는 현장에 들어갔겠냐?”


“알았어요. 그럼, 사업계획서 좀 갖다 주세요. 서류부터 검토해 볼께요.”


“알았어. 사업계획서 당장 보낼테니까 검토 좀 잘해 봐.”


사업성은 나쁘지 않았다. 사업소장에게 보고했더니 한번 해보라고 했다. 수주경쟁이 치열한 상황이라 소장도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장 과장, 현장설명회에 업체들이 많이 왔어. 20위권에서만 10군데가 넘어.”


당연한 일이었다. 아파트 분양시장이 달아오르면서 재건축재개발 현장설명회장마다 성황이었다.


사업소 직원들은 당장 수주할 것이 아니더라도 현장분위기도 보고 공부도 할겸 현장설명회를 쫓아다녔고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었다.


주택사업부 사업소에 발령난 초짜 직원들은 아직 재건축재개발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현장이 최고의 학교 아닌가? 백두건설 북부사업소장 또한 직원들에게 현장을 뛰어다니라고 주문하고 있었다.


“입찰 마감을 해 봐야 어느 회사가 진짜 마음이 있는지 알지요?”


장 과장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각 회사 입사 동기들을 연락해 보며 정보를 취합했다. 입찰 마감 결과 경쟁 상대는 장백건설이었다. 요즘 장백건설하고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뭐야, 또 장백건설이야? 이거 또 비상걸리게 생겼구만.”


소장의 넋두리였다.


“본부장님께 보고드렸더니 이번에는 절대 지면 안 된대. 지난번에 졌었잖아.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라는 거야. 다들 알아 들었지?”


안암6구역 토지등소유자들은 아닌 밤 중에 홍두깨가 따로 없었다. 대한민국 최고 시공사인 백두건설과 장백건설이 서로 수주하겠다며 난리법석을 치니 말이다.


5차 추진위원회의에서 총회 상정 업체가 결정된 다음 날 아침 안암6구역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에 장백건설 어깨띠를 두른 홍보요원들이 등장했다.


무려 20명이나 되는 늘씬한 아가씨들이 출근하는 주민들을 향해 인사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어느 새 안암6구역 수주담당이 되어버린 박 과장으로서는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선수를 빼앗기고 만 것이다. 소장도 난리가 아니었다.


“박 과장, 본부장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만 알아둬. 이거 잘못되면 나나 당신이나, 알지?”


된통 당하고 나온 박 과장은 당장 민익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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