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미 건축사-- TV에서 시작된 주거환경의 변천
김수미 건축사-- TV에서 시작된 주거환경의 변천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10.04.07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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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7 13:28 입력
  
김수미
㈜희림건축사사무소 건축사
 

 
1972년 공전의 히트를 친 일일연속극 ‘여로(旅路)’가 우리나라 아파트 시설기준의 변천사에 영향을 미쳤다라고 하면 지나친 말장난일까.

1973년 주택이 없는 국민에 대한 계획성 있는 주택의 공급을 위해, 〈공영주택법〉(1963년 제정)에 이어〈주택건설촉진법〉이 새로 제정됐고 이어 1976년 9월에는 동법 건설부령에서 복리시설 조항에 ‘텔레비죤 공청시설’이라는 항목이 처음 등장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시대 TV공청설비(공청안테나)는 전기·도로·상하수도와 같은 ‘부대시설’이 아닌 거주자의 생활복리를 위한 ‘복리시설’로 분류됐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텔레비전의 영향력은 오늘날의 영화의 인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방송 3사인 KBS, TBC, MBC가 1960년대에 나란히 개국했고, 연속극에서 삼국지를 방불할 시청률 싸움이 불붙었다. TV수상기 보급률도 연속극 인기와 비례할 수밖에 없었는데 여로의 주인공인 영구(장욱제 扮)가 색시(태현실 扮)를 드디어 만나는 클라이막스 무렵엔 TV수상기 보급대수가 100만대를 돌파했다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부인들은 동네 빨래터에서 수다를 떨라치면 TV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가히 우리의 생활 문화를 뒤바꿔 놓은 경제적·문화적 아이템이었다.

이런 배경 하에 1970년 1976년 법령 시행 이후, 1970년 10가구당 1대꼴이었던 TV가 1980년엔 5가구당 4대꼴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분위기에서 ‘텔리비죤공청시설’을 주거환경에 꼭 필요한 복리시설로 강제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주목할 부분은 우리나라 〈주택법〉에 의한 시설기준의 변천사는 우리 주거문화의 수준과 기대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그 시대의 상식과 여건에 맞게 변하는 것이 법이다. 변화하는 법 항목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당시 사회적으로 일반화된 아파트에 대한 인식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 마포, 여의도, 반포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때의 부대복리시설 기준은 매우 단순했으며, 단순한 만큼 당시에 요구되었던 도시 내 공동주택에 대한 환경인식은 명확했다. 리어카도 들어가기 힘든 비좁은 골목길과 쓰레기로 연상되는 ‘후진적’ 주택가와 비교해 볼 때, 널따란 도로 사이로 질서정연하게 서있는 아파트단지는 합리성과 기능성 속에서 절제된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진정한 근대도시의 산물 자체였다.

도로, 전기 및 상하수도, 보건위생을 위한 공동욕장, 최소한의 생필품을 바로 집 앞에서 살 수 있는 시장, 그리고 어린이를 위해 배려된 오픈스페이스인 아동유원(어린이놀이터)은  <공영주택법> 시절 규정되었던 기본시설이었다. 이후 1973년 〈주촉법〉으로 새로 법이 제정되면서 부대시설에서는 공중전화와 보안등(가로등)이 추가됐고, 복리시설에서는 운동시설, 의료시설 그리고 오물 및 진개(塵芥)의 수거시설이 추가됐다. 고밀도 도시주거에서 정책인과 건축가들이 얼마나 위생, 건강, 안전 등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역시 또한 흥미를 끄는 것은 오물 및 진개의 수거시설도 부대시설이 아닌 복리시설이었다는 점이며 법 원문에는 ‘다스트슈트’를 시설하라고 되어있다. 필자가  1976년에 시골에서 부산 시영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처음 접했던 더스트슈트(dust chute. 쓰레기 등을 아파트 공동계단이나 부엌발코니에서 집적구까지 직접 떨어뜨리도록 만들어진 수직통로)는 최근 유행하는 모토로이에 탑재된 안드로이드 OS만큼이나 최첨단 문명의 상징이자 도시생활의 최고 혜택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더스트 슈트는 편리하기는 하나 오히려 주거위생 환경을 더 해치는 요인이 됨에 따라 주민들 자체결정으로 폐쇄되기 시작했고, 1992년 10월에는 아예 법 규정에서 삭제됐다. 이를 대신해 폐기물보관시설기준이 등장했으며, 뒤이어 1995년에 쓰레기분리수거제도가 시행됐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아파트 생활양식의 변화인가.

연속극의 고전 여로까지 들먹이며 장황하였으나, 누군가 ‘생활양식이란 사회집단의 목표와 욕구의 결과’라고 했고 ‘우리의 집과 마을이 생활양식의 물리적 표현’이라고 했듯이 우리의 아파트 주거환경도 이렇게 변해왔다는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의 주거환경에 대한 욕구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그에 발맞춰 아파트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사회·기술·경제적 여건변화에 적합한 최적의 주택을 공급하려는 전문가들의 노력 또한 쉼 없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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