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의 국토이야기>조선왕조실록의 의미
<김의원의 국토이야기>조선왕조실록의 의미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8.07.23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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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3 15:58 입력
  
김의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조선왕조실록! 흔히들 이조실록이라 부른다. 조선조의 왕조실록을 이조실록이라고 한 것은 일본사람들의 잔꾀에서 비롯됐다. 되도록이면 우리나라를 비하하기 위한 노력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우리국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수치스러운 명칭을 그대로 쓰고 있다. 심지어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까지 ‘이조실록, 이조실록’ 하고 있다. 되도록이면 말수를 줄여보자는 것인지는 몰라도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 어떤 이들은 조선왕조실록과 이조실록을 다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결국은 말이 더 길어지고 말았다. ‘조선왕조실록, 즉 이조실록’이라고 말해야 알아듣게 되어 있다.
 
실록이란 문자 그대로 사실의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이성계91392년 7월)부터 철종(1863년 12월)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1천706권)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인 연월일순으로 기록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현존 세계3대 실록의 하나이다. 중국에 명조실록이나 청조실록이 있으나 이들은 각각 250년간의 기록에 불과하다. 이에 비한다면 조선왕조실록은 실로 500년에 가까운 장대한 기록이라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유럽에 수많은 왕조가 있었지만 이런 실록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기록을 소중히 해 왔느냐 하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이 정사(正史)는 아니다. 실록 자체를 편찬할 때 승정원일기나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의 기록을 참작해서 만드는 것이지만 실록 자체는 어디까지나 정사(국사) 편찬의 제1차적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실록 이상의 체계적인 자료가 없다는 점에서 이 실록은 가히 정사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역사와 동양의 역사간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서양의 역사는 시민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시 말하면 황제나 권력자에 대한 대항의 역사이기 때문에 역사 편찬에 있어 어떠한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동양의 역사(특히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이 아니고 왕실의 관직자, 즉 권력자의 측근들이 꾸민 역사이다. 그렇게 때문에 동양의 역사는 서양의 역사에 비하면 발랄함이나 진취성이 없는 퇴색한 것 같은 인상을 갖게 한다.
 
이러고 저러고간에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민족 문화의 핵심이다. 비록 왕실 중심의 기록이기는 하나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근본적인 자료일 뿐 아니라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의 국제관계 자료도 풍부하다.
 
이 조선왕조실록이 왕실 비사의 탈을 벗고 학술연구 자료로서 공개된 것은 한일합방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이 실록을 읽을 수 있게 허가된 사람은 극히 한정됐다. 이 실록공개의 제2단계는 1930년에 경성제국대학에서 사진축쇄본 30부를 찍어 일본내의 국공립 대학 도서관에 배포한 후의 일이다. 이때도 미국이나 유럽의 대학들에게는 제공되지 않았다. 해방후인 1946년 이 실록의 보급판 출판이 시작되었으나 1950년 6·25동란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후 1953년 일본 동경의 학습원 동양문화연구소에서 우리 실록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선왕조실록 전50권을 출판한 것은 1971년의 일이었다. 이것은 서울대학이 보관하고 있던 원본 4페이지를 한 페이지로 축쇄영인한 것이다.
 
고려도 500년간의 실록이 있었지만 수많은 전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지금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조선조가 실록을 편찬한다는 것은 폭서(曝書)란 보관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폭서란 습기와 좀을 예방하는 기술이다. 춘추사관이 왕의 옆에 엎드려 뭔가 쓰고 있는 것은 단순한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왕의 언동을 기록함으로써 왕을 견제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실록에는 월식, 일식, 별자리의 변화를 어김없이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의 기록외에 왕의 실정에 대한 경고 구실을 하기도 했다.
 
실록의 보관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한양, 충주, 전주, 성주의 네곳 사고에 보관해 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사고의 실록을 제외한 세곳의 실록이 전화로 소실되었다. 전주사고가 전화를 면하게 된데는 고경명 의병장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1592년 7월 8일부터 10일까지 왜군이 전주를 공격했으나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들의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틈을 타서 실록은 해주로 옮겨졌다가 강화도로 옮겨졌다. 1603년에는 다시 3부를 만들어 서울, 강화, 태백·묘향·오대산에 사고를 설치하고 각 1부씩 보관했으나 다 없어지고 1930년 경성제대에 2부만 남아있었다.
 
어쨌든 오늘의 조선왕조실록은 고경명 장군이 아니었다면 고려왕조실록처럼 완전히 실전될 뻔했다.
 
▲김의원(金儀遠) 교수 약력= △일본대학 공학박사 △건설부 국토계획국장·도시국장 △국립지리원장 △국토개발연구원장 △경원대학교 총장 △경원대학교 명예교수(現) △대한건설진흥회 회장(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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