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의 국토이야기>대제학 존엄성과 대학총장
<김의원의 국토이야기>대제학 존엄성과 대학총장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8.06.18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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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8 13:06 입력
  
김의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몇 년전의 일이다. 수업이 끝나자 학생 하나가 질문을 해왔다.
 
“교수님, 서울대학교 총장과 교육부장관 중 어느 쪽이 높아요?”
“국무위원 급이니까 동격이지”
“그럼 서울대 총장이 교육부장관된 것을 영전이라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기야 그렇다. 옛날 선비들은 대제학(大提學)이면 그만이지 예조판서나 호조판서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들은 이야기인데 6·25때 납북된 인사 가운데 이북 출신인 전봉채(田鳳采)란 사람이 있었단다. 일제때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경북 성주와 안동의 군수를 지냈는데 해방후에는 경상북도 인사처장을 거쳐 퇴관후에는 당시의 대구대학(영남대학의 전신) 학장도 지냈다.
 
이분이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고 여기저기 연고지를 찾다가 충북 어느 고을에 전(田)씨가 많이 살고 있는 것을 알고 그곳 전씨 문중의 족장인 70대 노인을 찾아갔다.
 
그때만 해도 초면이면 으레 집안족보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경력을 따지는 것이 상례였다.
 
“저는 성주군수와 안동군수를 지냈습니다.”
“허어, 성주목사와 안동부사라, 우리 가문에서 큰 인물이 났구려. 그리고….”
“도지사 밑에서 관리들의 인사를 처리하는 경상북도의 인사처장을 지냈습니다.”
“예끼 이사람 그것은 아전(衙前) 아닌가. 그 다음은….”
“대구대학 학장을 지냈습니다.”
“학장, 그건 대제학인데, 됐어, 대제학이면 국회의원 자격은 훨씬 넘어.”
 
무릎을 탁 친 노인의 탄성에 그만 기가 막혀, 이런 영감을 믿고 입후보했다간 망신당하기 알맞겠다 싶어 발길을 되돌렸다는 에피소드다.
 
대제학은 홍문관과 예문관의 최고 관직이다. 예문관은 왕명을 출납하는 곳인데 왕의 이름으로 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곳이고, 홍문관은 임금과 세자에게 글을 강론하는 일이 주된 기능이다. 한사람이 양쪽 대제학을 겸하는 것을 양관대제학이라 했다.
 
선출방법은 학문과 문장이 당대 으뜸이 될 만한 사람 가운데서 전임 대제학이 1명을 추천하고, 자격이 있다고 공론에 오른 사람 2명을 골라, 3명을 후보자로 해서 정1품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종1품의 좌찬성 우찬성, 정2품의 좌참찬 우참찬 6조판서 등 13명이 모여서 투표로 선출했다.
 
이렇게 해서 선출된 대제학의 품계는 판서와 같은 정2품이지만 그 학문과 문장이 당대 최고라는 명예를 갖고 있었다. 본인이 벼슬이 높아져서 3정승에 이르더라도 본인이 사퇴하기 전에는 겸직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문무백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조선왕조에서는 벼슬길에서 가장 무게있는 것은 대제학이라는 말이 생겼다. 퇴계선생도 공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낸 뒤 마지막 벼슬이 대제학이었다.
 
조선조 519년간 3정승과 6조판서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는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를 따를 가문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양반중의 양반으로 꼽는 가문은 연안이씨와 광산김씨이다. 조선조 519년 동안 대제학을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연안이씨, 광산김씨, 전주이씨로 각각 7명씩이다. 그리고 이들 세 가문을 포함, 양관대제학을 배출한 집은 5개 가문이 있으나 양관대제학을 두사람이나 배출한 것은 연안이씨 뿐이다. 이런 뜻에서 연안이씨를 우리나라 최고의 가문으로 치는지 모르겠다.
 
일본에서는 내각총리대신 즉 수상과 버금가게 대접하는 ‘4대 현인’이란 것이 있다. 도쿄대학 총장, 일본은행 총재, NHK회장, 아사히신문 주필이 그것이다.
 
영국에서는 오랜 전통으로 국가에 큰 일이 생기면 총리는 각료회의 전에 먼저 야당 당수, 영국은행 총재, 런던타임즈 주필 등 세사람을 총리관저에 초청하여 중대사안을 설명하고 의견을 종합해서 각의에 임하는 복안을 정한다고 한다.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런던대학의 총장은 총리관저로 부르는 무례(無禮)를 범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의견을 경청하는 예를 갖춘다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을 그만 둔 후 할 수 있는 직업이란 대학총장밖에 없다 한다. 아이젠하워가 군인으로서 최고영예직인 나토(NATO)사령관을 지낸뒤 콜롬비아대학 총장직에 취임한 일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이렇게도 대학의 총장이란 인간으로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최고의 영광된 신분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대학교 총장이 장관이 되면 출세한 것 같이 착각을 하며 당사자나 그 주위사람들이 기뻐하는 것 같아 민망스럽기 짝이 없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가치관이 이렇게도 전도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대학의 자율성이나 학원의 자유란 것도 따지고 보면 대학총장이나 교수들이 그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얼마나 존엄한 것이가를 몸소 터득한 자존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속적인 현관(縣官)의식에 사로잡혀 장관되는 것을 영예로운 것처럼 신망하는 속취(俗臭)가 깔린 마당엔 그림의 떡이다. 장관은 고사하고 국무총리를 하란대도 딱 거절할만한 고고한 대학총장이길 학문의 세계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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