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 교수-- 파리 길거리 통행 분뇨 세례
김의원 교수-- 파리 길거리 통행 분뇨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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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3.27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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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7 16:41 입력
  
김의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파리의 도시문화사(1)
 
흔히들 서양문화를 ‘돌의 문화’라 하고 동양문화를 ‘나무의 문화’라 한다. 서양의 건물은 돌로 되어 있고 동양의 건물은 목재가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건물이 대개 석조이지만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도 석조의 비중이 높은 곳이 파리였다. 1903년 파리에 처음 철근콘크리트 아파트가 나타날 때까지 파리의 건축물은 긴 역사를 통하여 석조로 일관해 왔다. 그러면 이들은 석조건물에 필요한 자재를 어디서 가져왔을까?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바로 파리의 지하였다.
세느강 우안(右岸)의 몽마르트 일대와 좌안은 석회암의 보고였다. 캐낸 석회암을 일정한 규격에 따라 재단한 다음 하나하나 쌓아올리면서 회반죽으로 땜질만 하면 된다. 제법 잔손이 가는 중노동이기는 하지만 지진이 없는 파리에서는 기술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석회암을 자재로 그들은 노틀담사원을 비롯하여 지금의 루브르박물관과 베르사이유 궁전 등을 건설했다. 일반시민의 주택도 13세기부터는 석조건물 보조금제도를 만들어 적극 보급토록 했다. 그 결과 파리 시가지는 유럽 어느 도시보다도 아름다운 도시로 발전했다.
 
석회암의 지하 채굴은 세느강의 남쪽이 더 발달되었다. 특히 12∼15세기에 있어서는 특별한 규제도 없이 석재를 따라 무분별하게 파들어 갔다. 그 결과 공동회랑(空洞回廊)은 로마의 카타콤처럼 미로가 되어 이리저리 얽히고 설키는 꼴이 되었고 그 연장은 자그만치 300㎞나 되었다.
 
호사다마라! 좋은 일에는 액운이 따르기 마련이다. 프랑스혁명 15년전인 1774년에는 320m의 도로가 25m 밑으로 함몰하는 등 지반침하가 잇따르자 1813년에는 급기야 지하채굴에 대한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 지하동굴을 일반 시민에게 공개한 것은 1874년인데 공개구간은 2㎞에 불과하다. 지금의 파리지하철과 하수도관은 이 지하동굴 위에 가설되어 있다.
 
그런데 기구하게도 이 지하동굴은 2차 세계대전때 한쪽은 프랑스 상원의 방공호로 쓰였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독일군과 레지스탕스의 사령부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 괴이한 파리 지하동굴의 전모가 밝혀질 날이 언제인가 궁금하다.
 
파리는 역사적으로 라이벌인 런던에 비해 물사정이 좋지 못했다. 16세기초 물문제 해결을 위한 포고령까지 내렸다. 그것은 특권층에 대한 취수우선권의 제한을 비롯한 수원지의 복구와 공사비 충당을 위한 포도세(葡萄稅) 신설이 주된 내용이었다.
 
나폴레옹1세는 1825년에 103㎞에 달하는 운하를 건설해 1인당 급수량을 6리터로 올렸으나 새발의 피였고, 운하 때문에 세느강은 극심한 오염을 겪어야만 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파리시민들은 세느강물을 여과하지 않은 상태로 먹고 있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오스만의 용단으로 파리에서 160㎞ 떨어진 욘느강에서 취수하여 물 공급을 배가시켰을 따름이다. 지금 세계에서 제일 훌륭하다는 파리의 하수도는 오늘이 있기까지 그들이 겪은 고난의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다.
 
1588년 몽테뉴는 그의 수상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베니스나 파리 같은 도시도 시궁창과 가로에서 발생하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이들 도시들이 갖는 친밀감이 무산된다”라고.
 
이 고약한 구린내의 원흉은 말할 것도 없이 시민이 배설한 분뇨였다.
 
쌀농사를 주로하는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분뇨가 농업의 비료로 쓰여졌기 때문에 도시의 분뇨는 근교 농민이 처리해 주었다. 그러나 유럽의 보리·밀 농사는 파종전의 심경농경법이기 때문에 사람의 분뇨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도시가 커가면 커갈수록 분뇨처리에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5∼6층의 석조건물이 많은 파리에서 세대마다 저장식 변소를 설치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기껏해야 수거의 수고를 덜기위한 공동저장소 설치가 고작이었으나 이것도 부족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부득이 가족용 변기(요강)을 애용했다. 원칙적으로 변기의 내용물은 가까운 인근 공지에 있는 분뇨통에 버리게 되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물이 마른 우물에 버리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16세기 말엽의 파리시민들은 공동저류장까지 가는 것도 귀찮아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가르데 로”(물조심 혹은 머리조심)란 구호를 세 번 외친 다음 요강에 담긴 분뇨를 창넘어로 길바닥에 버리는 관습이 일반화됐다. 경고를 미처 듣지 못한 통행인은 머리로부터 분뇨세례를 받게 되는데 당시 시민의 의식은 그들을 바보 취급하는 분위기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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