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 교수-- ‘역사도시’ 경주의 고민
김의원 교수-- ‘역사도시’ 경주의 고민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8.03.17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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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7 17:40 입력
  
김의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경주는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10대 유적지인 동시에 신라 천년의 고도이다. 신라가 멸망한 지 천년이 지났는데도 많은 고적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1962년 두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리에 달성한 박정희 대통령은 때마침 완공을 본 경부고속도로와 연관시켜 경주관광 개발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이때 대통령의 관광지 개발의 우선순위는 확고했다. ①설악산 ②제주(중문단지) ③경주 ④부여의 순이었다. 대통령은 경주의 경우 제주도와 더불어 국제관광지로 개발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특히 경주는 웅대·찬란·정교·활달·우아·유현의 감이 살아날 수 있도록 역사를 재현하라고도 했다.
 
1972∼1981년까지의 10년간을 계획기간으로 한 경주개발의 특색은 첫째 산재해 있는 문화재의 발굴·재정비와 보문단지 개발이었다. 당초 계획은 보문단지를 미국의 라스베가스처럼 완전한 국제 유흥지로 조성할 작정이었으나 국회의 반대에 부딪쳐 중간에 계획은 수정되었다.
 
경주의 1단계 개발은 사실상 1978년에 끝났다. 1979년부터 2단계로 기성시가지에 대한 재정비를 착수하려는 무렵 10·26사태로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1972년 관광개발이 시작되자 ‘역사와 문화의 도시’인 경주는 고민이 생겼다. 기성시가지에 대한 도시계획의 통제가 발효됐는데 핵심사항은 고도제한이었다 기성시가지는 3층이상 건물의 신축을 금지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골기와 한옥촌(韓屋村)도 지정되었다.
 
사실은 이런 통제 이전에도 경주는 하나의 멍에가 있었다. 문화재관리법에 의한 ‘사적지 보호구역’이 그것이다.
 
경주는 시가지의 44%가 여기에 묶여있어 건축허가를 받아도 마음대로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땅만 파면 기왓장 부스러기 등 문화재가 나온다. 이럴 경우 건축주는 신고를 해야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건축이 중지되거나 취소되기도 했다.
 
문화재보호도 좋지만 당대를 살아야 할 시민에게는 이만 저만한 불편이 아니었다. “불국사나 석굴암도 좋다. 첨성대도 좋다. 그렇다고 우리는 수많은 고분과 사찰터와 석탑이나 바라보고 살라는 것이냐?”는 것이 시민들의 항변이다.
 
시민들의 고민은 또 있었다. 경주에는 연간 590만명 정도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이 가운데 29%에 해당하는 170만명이 수학여행차 오는 학생들이다. 그런데 수학여행도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기차편이라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고속도로가 개통되자 버스여행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들의 체류기간은 고작 2박3일인데 먹거리의 대부분을 버스에 싣고 오게 되었다.
 
더욱이 1980년대부터는 이들의 숙소도 변두리의 콘도로 바뀌어 버렸다. 게다가 최근에는 학생들의 수학여행자수도 감소일로에 있다 한다. 인솔하는 선생이나 학생들의 취향에 변화가 온 것이다. 고리타분한 역사나 문화의식 따위는 안중에 없고 차라리 대도시의 네온불빛이 선망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일반 탐방객도 마찬가지다. 420만명이란 숫자는 크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자가용을 이용하기 때문에 당일치기 손님이거나 거쳐가는 통과객이 늘어났다. 자고가는 손님도 겨우 1박인데 그것도 보문단지의 호텔에서 묵고 간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연간 590만명의 관광객은 경주에 쓰레기만 남기고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궁극적으로 경주시민들의 재산권 보호에 귀결된다. 인근의 울산과 포항은 공업개발로 재산가치가 크게 증대되었는데 반하여 경주는 2중 3중의 규제와 통제로 재산상의 손실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주는 경주 시민만의 경주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경주이고 세계의 경주이다. 그렇다고 경주 시민들에게만 희생을 강요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개발과 보전을 적절히 조정하는 슬기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는 국토설계의 모티브를 미(美)에 두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일본은 국토개발의 모티브를 경제원리에 두고 있는 실정이니 여기서 파생되는 부작용이 국토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아무리 개발과 보전을 조정한다 해도 경주에 공장과 고층건물을 세울 수는 없다. 굳이 방법을 찾는다면 파리 방식을 취하는 수밖에 없다. 구시가지는 그냥 두고 교외 변두리에 ‘신경주’를 건설하는 길이다. 이것이 역사의 소명이라면 너무 가혹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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