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지리-- 배산임수형으로 음기 없는 양명한 터
고제희의 풍수지리-- 배산임수형으로 음기 없는 양명한 터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8.03.17 06: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8-03-17 16:36 입력
  
기맥이 잘 갈무리 된 곳은 아니고
입수룡의 생기는 왕성하지 못하다
 

고제희

대동풍수지리학회 대표이사

16)추사고택과 추사의 묘
 
신례원을 지나 예산읍으로 향하다가 삼거리에서 온양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주유소를 끼고 돌면 곧 다리가 나오고, 당진 쪽으로 조금 가면 ‘추사 선생 고택’이라 쓴 안내표지가 나온다. 길 옆 과수원을 따라 차로 약 5분정도 달리면 넓은 주차장이 좌측에 나타나고, 대감집의 위세가 느껴지는 고택이 그 위쪽에 있다.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서예가였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 집은 추사의 증조부이며 영조의 부마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용궁리 일대의 토지를 별양전으로 하사 받아 지은 살림집이다. 안채, 사랑채, 문간채, 그리고 사당채로 구성된 이 집은 크기가 약 80평이며, 18세기 중엽의 전형적인 상류 주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추사 이후 후손이 살며 선조의 유지를 받들다가 1968년 타인에게 매매되었다. 그 후 1976년 예산군에서 매수하여 지방문화재 제43호로 지정,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다.
 
어린 백송(白松)이 몇 그루 서 있는 솟을대문을 지나면 바로 사랑채가 나타난다. 이 백송들은 추사가 청나라 연경에서 가져온 백송의 묘목으로, 본래의 백송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세월의 두께가 두껍게 내려앉은 뜰에는 큰 은행나무와 감나무 그리고 석류나무가 자리잡아 고택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고택의 구조를 살펴보면 6간의 안채와 2간통(間通)의 대청과 안방, 건넌방이 있으며 안방과 건넌방의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갖춘 ‘□’자형 집이다. 안방과 건넌방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장은 다락으로 되어 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는 대청은 6칸으로 흔하지 않는 규모이고, 이런 ‘□’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 대갓집이다. 사랑채는 ‘ㄱ’자형으로 안채와 엄격히 구분되어 있고, 남쪽에 1간, 동쪽에 2간의 온돌방을 두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이처럼 마루 공간이 커서 집 주인이 사회적, 예술적 활동을 하는 데 긴요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 집은 현재 군(郡)에서 조선 사대부의 삶을 보여 주는 전시장으로 꾸며 놓았는데, 사랑채 안에는 안석과 궤, 책상, 문갑들이 잘 정돈되어 마치 사람이 살고 있는 듯 하다. 또한 기둥에는 추사체를 집자한 온갖 주련이 걸려 있어 추사의 체취을 느끼게 한다. 사랑채 댓돌 앞마당에는 석년(石年)이라 새긴 돌기둥이 목단을 배경으로 서 있는데, 특히 ‘년(年)’자가 멋지다. 이 돌기둥은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한다. 추사는 당시 일기 시작한 실학의 거두 박제가의 문하생이었고, 그 자신도 중국을 다녀 온 실학자였으므로 실사구시의 학문을 펼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방에는 모조품이기는 하나 추사의 유묵이 걸려 있어 추사체를 엿볼 수 있으며 사랑채에 있는 ‘農祥室(농상실)’은 지방문화재 44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도 그의 ‘부작난도’는 항상 난(蘭)치는 것을 예서(隸書) 쓰는 법에 비유하여 기법(技法)보다는 심의(心意)를 존중하는 문인화풍(文人畵風)을 보여주어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추사고택은 용산에서 동진한 용맥의 남쪽과 추사 묘로 입수된 작은 용맥의 가운데에 자리잡아 동향을 바라보는데, 기맥이 잘 갈무리된 곳은 아니고, 평편한 계곡의 안쪽에 위치한다. 따라서 입수룡의 생기는 왕성치 못하다. 바람과 물의 흐름을 살피면 양기는 우측에서 죄측으로 흘러가는 우선수(右旋水)이고, 곤방(坤方)과 정방(丁方)에서 득수한 수(水)가 고택에 도래한 다음 간파(艮破)로 소수하는 금국(金局)이다. 고택은 용산에서 안말로 내려뻗은 미약한 청룡에 고택의 좌측을 기대어서 내당도 우선수라 내외당이 순행하니 장풍이 양호한 곳에 터를 잡았다. 또 주산인 용산이 차가운 북서풍을 막아주고, 배산임수의 지형이라 일족 양호하고 배수도 좋아 집 안에 음기(陰氣)가 머물지 못하는 양명한 터이다.
 
예산의 용궁리 백송은 소나무로 둘러싸인 곳 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울타리로 보존되어 있다. 본래 줄기의 밑에서 세 갈래로 갈라진 삼간성(三幹性) 소나무이나, 두 가지는 죽고 현재는 한 가지만 남아 빈약한 모습이다. 수피는 거칠고 흰색이 뚜렷하다. 울타리 안에는 어린 백송들이 함께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추사가 25세 되던 순조 9년(1809) 10월에 부친 김노경을 수행하여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옆에 심었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줄기의 상당한 부분이 잘려 나가 현재 수세는 매우 약하나, 생육 공간은 충분하며 관리도 양호한 편이다.
 
또 용산에는 추사가 공부하고 수도하였다는 화암사가 있다. 이 절의 건립 연대는 알 수 없고, 월성위에게 하사된 땅에 포함되어 그 일가에 세습되었다. 1752년 월성위가 중건하였으나, 그 후 대웅전이 소실되어 요사채만 남게 되었다. 이 절에서 불교에 정진한 추사는 제주도 유배 때도 문중에 편지를 보내어 중건을 지시할 정도로 아꼈던 절이다. 이 절에는 추사의 친필인 ‘無量壽閣(무량수각)’‘詩境樓(시경루)’ 등의 편액이 지금도 걸려 있고, 특히 골짜기 암벽에는 ‘詩境(시경)’‘蓬來(봉래)’‘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택)’이라 쓴 친필이 새겨져 있다.
 〈대동풍수지리학회 02-3473-9763〉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