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의 국토 이야기>농업혁명의 산실 ‘수원’
<김의원의 국토 이야기>농업혁명의 산실 ‘수원’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8.01.23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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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3 16:40 입력
  
김의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일본은 식민지를 통치하는데 3가지 큰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우리나라를 영원한 농업국가로 통치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400만∼500만석의 식량부족으로 연간 1억5천만달러 정도의 쌀을 수입하고 있어서 한국을 공업화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둘째는 일본의 상품판매시장으로 통치하자는 것이고, 셋째는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통치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통치방침을 실현하기에는 당시 우리나라의 수리시설이 크게 미흡했다. 하지만 당시의 수원은 수리시설이 비교적 완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정적 시험이 가능했다. 이런 실정을 파악한 일제는 보호정치시대인 1906년에 수원에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이란 이름의 농업시험장을 설치했다.
 
이 시험장이 설치됨으로써 수원은 농도(農都)로서의 기능이 점차 굳어져갔다. 일제가 설치한 이 시험장은 일본식 농업을 우리나라에 이식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어 그들은 1907년 서울에 있던 농림학교를 수원으로 이전했다. 이것이 오늘의 서울대 농과대학의 전신이다.
 
초기에는 권업모범장의 장이 학교장을 겸임함으로써 농학협동체제를 갖춘 다음,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역시 서울에 있던 여자잠업강습소를 수원으로 이전했다. 이어 1913년에는 잠종(蠶種) 제조소를 설치했다. 1915년에는 이(李)왕가에서 말의 개량을 위해 화산에 목장을 개설했고 1924년에는 수원의 여걸 조중환 여사에 의해 사설 기호(畿湖) 잠업강습소가 문을 열었다.
 
일제는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륙침략을 구체화하기 위해 조선을 부분적으로 공업화하기로 하고 남농북공(南農北工) 정책을 편다.
 
이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1929년에 권업모범장을 농사시험장으로 이름을 바꾸어 시험장의 기능을 보강했다.
 
그리고 1922년에는 수원농림학교를 고등농림학교로 승격시켰으며 1936년에는 새로 수원농림학교를 설치하고 1944년에는 수원고농을 농림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이리하여 1945년 해방때까지 수원은 우리나라 농업의 메카로서 기반을 굳혀갔다.
 
1962년 혁명정부는 식량의 자급을 위한 농업기술개발을 목적으로 수원에 농촌진흥청을 설치했다. 이 기관의 설치는 수원으로 하여금 요지부동의 농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은 종래의 단순한 시험기능에 연구기능까지 덧붙였으니 말이다.
 
농촌진흥청은 산하에 작물시험장을 비롯해 맥류시험장, 잠업시험장, 원예시험장, 축산시험장, 농공이용연구소, 농산물이용연구소, 임목육종연구소 등 농업, 임업, 축산, 원예에 이르는 시험장과 연구소를 가지게 된다. 이들 연구소와 시험장은 1960년대 후반에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녹색혁명을 이룩한 주역들이다.
 
녹색혁명의 핵심은 ‘통일벼’다. 통일벼는 벼가 이삭에서 잘떨어지고 밥맛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이것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보릿고개라는 춘궁기를 면치 못했을 것이고 식량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업개발은 엄두도 못냈을 것이다.
 
우리나라 쌀 생산량은 1960년대부터 10여년간 2천만석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통일벼가 논면적의 15%이상 재배되기 시작한 1974년부터 3천만석선을 돌파했고 총면적의 54%를 재배한 77년에는 불과 3년만에 1천만석이 늘어난 4천만석을 돌파했다. 이로써 10㏊당 쌀의 수확량이 494㎏에 이르러 종래 선망의 대상이던 이집트의 391㎏, 일본의 447㎏, 미국의 368㎏을 앞질러 세계 최고 다수확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기적의 통일벼는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나. 조국의 근대화를 위한 기초조건인 주곡자급을 목표로 당시 박대통령의 강력한 지시에 따라 수원의 연구팀은 필리핀에 있는 국제미작연구소(IRRI)의 육종과장 비첼박사의 도움 아래 연구를 진행했다. 서울농대의 허문회 교수를 주축으로 일본품종인 ‘유가라’와 인도형 ‘태중재래 1호’를 인공교배하여 얻은 것에 당시 기적의 쌀인 IR8을 교배한 다음 수차에 걸친 필리핀∼수원간의 왕래 끝에 IR667이란 기적의 쌀을 창조했다. 이것에 소요된 시간은 1965∼1971년까지 실로 6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일설에는 이 당시 기초품종으로서 이집트가 극비리에 가지고 있던 ‘신의 씨알’이란 것을 가지고 왔다는 말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렇듯 수원은 농촌진흥청이란 거대한 시험시설과 연구소, 서울농대와 수의대를 비롯 농업공무원 교육원과 새마을영농기술자중앙회 등을 가짐으로써 확고부동한 농업의 메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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