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지리>“각 지방마다 좋은 집터에 얽힌 설화 있다”
<고제희의 풍수지리>“각 지방마다 좋은 집터에 얽힌 설화 있다”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7.12.05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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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5 14:40 입력
  
터와 주위환경이 사람 살기에 조화로워야
선량한 기운이 들어와 건강하고 행복하다
 
고제희
대동풍수지리학회 대표이사
  
⑪ 풍수 설화가 전해지는 명당
 
신라 이후 풍수지리는 우리 민족의 기층적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쳐 왔는데, 그 중 마을이나 도시의 입지를 정할 때면 배산임수의 터를 찾되, 가급적이면 외부와 차단되면서 내부 공간이 넓은 곳을 선호하였다. 조선시대 왕도를 한양으로 정한 데에도 풍수지리가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길을 내고, 문을 만들고, 때론 길을 막기 위하여 소나무를 심는 것 외에도 궁성 내에 연못을 파는 일, 심지어 담을 쌓을 때도 풍수학에 따라 길함을 쫓으려고 하였다. 주택 역시 땅에 기반을 두고 짓는데, 터와 주위 환경이 사람 살기에 조화로워야 집안에 신령한 기운이 들어와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주택의 구성 요소 중 사람의 성장과 발달에 영향을 주는 대문, 안방, 부엌의 방위별 배치를 조합하여 주택 내에 생기가 극대화되도록 이론화시킨 것이 양택 풍수론이다. 그래서 각 지방마다 좋은 집터와 그에 얽힌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몇 개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첫 번째로, 안동의 앞내 마을에 위치하며, 자손이 크게 번창하고 5부자가 나란히 과거에 급제해 ‘오부자등과지처(五父子登科之處)’로 소문난 집이다.
 
밝은 달 아래서 비단이 펄럭인다는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이라 불리며 경주의 양동, 안동의 하회, 봉화의 유곡과 더불어 삼남(三南,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4대 길지 중의 하나로 꼽힌다. 비단은 귀한 사람이 입는 옷이고 그것을 밝은 달빛 아래에 깔아 놓았으니 세상에 이름을 날릴 인물이 나온다는 설명이다. 또 이 집이 흥미롭기는 생기가 응집된 방이 따로 있어‘산방(産房)’이라 부르는데, 이 방에서 태어난 자식들만 출세하고, 다른 방에서 태어난 사람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고 한다.
 
두 번째 정읍의 김동수 가옥은 지네를 닮은 청하산 기슭에 터를 잡아 이 집을 지네형 명당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집에서 내 너머를 바라보면 독계봉(獨鷄峰)과 화견산(火見山)이 보이는데, 닭은 지네의 천적이고 지네는 불을 무서워한다. 따라서 집 둘레에 나무를 심어 독계봉과 화견산이 보이지 않게 비보하고, 숲을 만들어 습지에서 지네가 안심하고 살도록 하였다. 또 지네는 지렁이를 먹는다하여 집 앞에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지렁이 모양의 연못을 팠다고 하니, 이 집의 꾸밈은 모두 풍수지리설에 따른 것이다.
 
또한 진주에는 봉알자리〈사진1〉가 전해져 내려온다. 진주 시내의 상봉동은 진주 강씨들이 대를 이어 세도를 부린 고장인데, 모두 대봉산의 정기를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을 창국한 이성계가 남쪽에서 인물이 많이 나오는 것을 싫어하여 무학대사를 시켜 진주의 지리를 살피도록 하였다. 무학대사가 대봉산을 살펴보니 그곳이 바로 명당이었고, 더욱이 대봉산의 지맥이 대골의 황새 터와 연결되어 큰 인물을 배출하도록 정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크게 놀란 무학대사는 대봉산의 이름을 봉황이 날아갔다는 뜻으로 비봉산으로 고쳐 부르고, 날아간 새가 다시 앉지 못하도록 산 옆 골짜기의 못 이름을 가마 못이라 고쳐 불렀다.
 
그러자 진주에서 다시는 큰 인물이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진주 강씨들은 마을의 지기를 강화시켜 인재가 다시 태어나도록 비보책을 썼는데, 마을 중심에 봉황이 다시 날아들도록 봉의 둥지를 만들고 ‘봉알자리’라고 불렀다. 진주 상봉동에는 흙으로 두둑하게 쌓아올려 산과 같이 만들고 그 한가운데를  움푹 파내어 마치 새의 알자리와 같이 만들었는데 이것은 훌륭한 인물이 다시 많이 태어나라는 의도에서 봉이 와서 알을 품으라고 ‘봉의 알자리’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강릉 경포대 가까이에 자리한 선교장〈사진2〉은 조선 시대의 사대부 집으로 뱃머리 형국의 명당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위촌 가에 위치한 선교장은 앞쪽에 고려들이 펼쳐져 있고, 시루봉에서 출맥한 용맥은 서진과 남진을 거듭하며 낮은 동산을 이루었고, 주산에서 동진한 용맥이 활모양으로 굽어 흐르는 안쪽에 위치한다.
 
큰 배가 부두에 정박해 있으니, 배에는 진귀한 물건과 많은 곡식이 실리고,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의 왕래가 많다. 그 결과 뱃머리 형국의 명당은 재물이 많이 모여 부자가 되고, 자손이 번창해 큰 복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이내번이 처음 지었고, 사랑채인 열화당은 1815년에 이후가 건립하고, 정자인 활래정은 1816년에 이근우가 중건했는데, 안채·사랑채·동별당·서볕당·사당·정자·행랑채를 고루 갖춘 큰 집이다.
 
다음은 함양의 지곡면에 위치한 고택으로 성종 때 정여창이 살던 집인데,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이곳은 괘관산의 지맥이 남강으로 인해 지기를 응집한 곳으로 500여 년을 이어오는 명당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마을의 좌측 계곡 비탈에는 처진 당송이 있고, 그 아래에는 ‘종암(鍾巖)’이라 쓴 동그란 바위와 함께 우물이 있다.
 
이 마을에 전해지는 풍수설에 의하면 이 마을은 ‘배의 형국’이라 여러 곳에 우물을 팔 경우 배의 밑바닥에 물이 솟는다고 하여 현 소나무 아래의 공동 우물을 제외하고는 개별로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처진 당송은 배의 돛대로 삼고자 400∼500년 전에 심은 나무라고 전한다.
 
마지막으로 경기 화성에 위치한 고택〈사진3〉은 나지막한 동산이 남북으로 삼태기처럼 집을 둥글게 감싸 안았고, 앞쪽에는 노적봉 모양의 해
 
운산이 바라보여 부자 명당으로 소문난 집이다. 왜냐하면 집 앞에 곡식을 쌓아놓은 듯한 산을 바라보면 지기가 발동해 스스로 부자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고택은 실제로 50간이 넘는 큰 집이나 대문을 정면이 아닌 북쪽의 측면에 두어 길에서 바라보면 집이 작아 보인다.
 
비록 큰 집이나 밖에서 보아 작은 집으로 보이게 지은 것은 전쟁이 나거나 세상이 어지러울 때 재앙을 방지하는 지혜가 엿보인다. 그리고 이 고택에 속한 건물들이 배치된 윤곽은 통칭 ‘月’자형으로 불리는 길상이다.
〈대동풍수지리학회 02-3473-9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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