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우소이야기>화장실이 웃는다(6)
<해우소이야기>화장실이 웃는다(6)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7.09.05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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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5 11:00 입력
  
‘돈과 권력의 상징’ 화장지의 역사
 
 
옛날에 종이는 귀한 물자였다. 종이가 발명된 것은 2세기경 중국에서였고 그것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4∼5세기나 되어서의 일이다. 일본에서는 나라시대(708∼782)에 이르러서야 자체 생산된 종이가 쓰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시대에도 종이가 귀하기는 마찬가지라서 희귀한 경전이나 관청의 기록에나 쓰였다고 한다.
 
이런 사정은 757∼764년에 토우다이지에서 경전 발간시 쓰인 종이의 가격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상품의 경우 일본 돈으로 2냥, 가장 싼 것이 1냥이었다고 한다. 당시 쌀 한 되가 5.5냥이었으므로 최상품의 종이 두 장 반값으로 쌀 한 되를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최하품의 종이라도 쌀 한 되로 5장밖에는 사지 못했다. 이렇게 비싼 종이를 뒤를 닦는데 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세서(洗書)라고 해서 한 번 썼던 종이의 먹물을 씻거나 혹은 이를 풀어서 재생지로 만들어 쓰는 일이 보통이었다. 이는 아름다운 풍속이었고 낭만이 있는 일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1390∼1596)에도 종이가 귀하기는 마찬가지여서 1492년에 종이 한 장의 가격이 2냥이나 되었다. 일꾼의 일당이 10냥이었으므로 하루종일 일해서 종이 5장 정도밖에 살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따라서 나라시대의 일본 귀족이나 헤이안시대(782-1185)의 미녀, 무사들도 종이로 뒤를 닦는 일은 없었다.
 
혼란스러운 전국시대의 한 기록에는, 무사의 저택에서 변소를 만들고 ‘그 선반에 나라 종이를 두었다’라고 되어 있다. 나라 종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에서 생산된 종이를 통칭하는 말로, 돈과 권력이 있는 무사들은 이 종이로 뒤를 닦았던 것이다. 전쟁으로 혼란한 시대에 종이로 뒤를 닦는 무사의 등장은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본격적으로 뒤를 닦는 데 종이가 쓰인 것은 에도시대(1596∼1868)에 이르러서부터였다. 이 시기에는 무사들 뿐만 아니라 상인들까지도 뒤닦기용 종이를 사용하게 되었다. 다만 에도에서 쓰였던 그 화장지는 폐휴지를 재생한 종이였다.
 
이 종이를 일러 아사쿠사 종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아사쿠사라는 곳 근처에서 만들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이유로 에도에서 화장지라고 하면 아사쿠사 종이를 일컬었는데 당시로써는 이 종이가 가장 싼 종이였다.
 
그러나 100장에 100냥이라는 만만치 않은 가격으로, 당시 구멍가게의 임대료가 월 500∼600냥, 인부들의 일당이 450냥 정도였으니 짐작할 만하다.
 
어떤 사람이 매일 적게는 3장, 혹은 많게는 10장 정도 사용한다면 매월 구멍가게의 임대료와 같은 액수를 화장실에 오물로 버리는 것과 같다. 비록 재생지였다고는 하지만 이토록 비쌌기 때문에 경제 관념이 발달한 오사카 사람들은 한 번 쓴 뒤닦기용 종이를 바구니에 모아서 되팔았다고 한다.
 
일본의 농촌에서까지 종이를 써서 뒤를 닦게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50년대 초반까지 화장실에서 종이를 사용하는 것이 황송했던 기억이 있다. 일본에서 수탈 당하고 독재자에게 검약이라는 이름으로 궁핍을 강요당했던 역사가 화장실의 진보를 막았다고나 할까. <자료제공 : 브리앙산업 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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