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의 국토이야기>조선도읍과 풍수지리설
<김의원의 국토이야기>조선도읍과 풍수지리설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7.04.25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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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5 15:38 입력
  
김의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풍수지리설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신라 말기경으로 추측되는데 이 사고방식이 역대 왕조의 수도 입지선정에는 물론 지방도시의 형성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신라말기에 천기를 잡아 고려를 세운 왕건이 당시 궁예의 근거지였던 철원에서 수도를 송악(개성)으로 옮긴 것도 풍수지리의 영향이 컸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 당시 개성을 ‘금돼지가 누워 있는 곳’등으로 표현하고 있었으며 김관의의 편년통록에는 도선(道詵)의 말이라 하며 ‘동방의 영산인 백두산 정기를 압축한 성지’라고 하는 등 고려조 이전부터 지리도참설이 만연하고 있었다.
 
또한 개성은 왕건 자신의 출생지였으니 지리도참사상에 몰두한 태조가 당시 국내 제일의 길지라는 개성에 도읍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392년 7월 17일 개성에서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는 그해 8월 13일 한양 천도를 지시했다. 한양은 고려 때부터 소위 송도지쇠설, 즉 송도는 이미 기가 다 빠져나갔다는 풍수도참에 의해 송도의 지기를 보완한다는 뜻에서 남경이라 불렀고, 서경이라 불린 평양과 함께 왕이 수시로 순주한 곳이었다. 더욱이 1357년(공민왕 6년)에는 보우 스님이 ‘한양에 도읍하면 36개국이 와서 조회한다’라고 하였고 1390년(공민왕 2년)에는 ‘천도하지 않으면 군신이 폐한다’라는 도선비기에 따라 한때 한양천도를 단행하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는 스스로 ‘옛날부터 역성혁명의 임금은 반드시 도읍을 옮겼다’고 말하면서 한양천도를 지시했으니 당시의 풍수도참설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 것이냐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한양의 시가지 계획에 있어서 지배적인 사상은 역시 풍수지리설이었다.
 
즉 진산인 백악(白岳)을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따라 성을 축조하여 이를 안산인 목멱산(남산)에 연결시켜 도성의 범위를 결정했다. 백악을 배경으로 주궁인 경복궁을 앉히고 부주산(副主山)격인 응봉을 배경으로 창덕궁을 배치하였고,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칙에 따라 종묘와 사직, 6조와 시장의 위치를 결정한 것이다.
 
도읍풍수는 장풍득수, 배산임수, 좌청룡, 우백호란 자연적 지형조건을 구비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풍수신앙은 점차 읍기(邑基)의 형태여하가 길흉을 결정한다는 이른바 유형관으로 발전되었다.
 
그런데 자연적 지리유형에 따라 결정된 각 도시들의 운세는 인위적으로 보완되어 왔다. 이른바 비보(취약점을 어떤 시설로 보완)와 염승책(부족한 요인을 없애거나 부족한 정도를 줄임)이 그것인데 그 실례를 몇 개 들어본다.
 
평양은 행주형(行舟型)이라서 수재를 입어 떠내려가지 않게 붙들어 놓기 위해 철로 만든 닻을 대동강 물 속 깊이 넣어 놓았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1910년대에 실시한 하천조사때 발견되었는데, 닻은 모두 4개로서 보통강과 대동강의 상하좌우에 각각 하나씩 투하했다. 투하시기는 1839년(헌종 5년) 8월의 대홍수 후로 추정되었고 조사때 발견한 닻은 다시 제자리로 넣었다 한다.
 
청주도 행주형인데 돛이 없으므로 용두사 절터에 높이 10여척의 동(銅)장을 설치하여 돛으로 간주하여 주성(舟城)이라 부르기도 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영천 부근에 까치산(작산)과 죽방산이란 두 산이 있는데 봉(鳳)은 길조인 동시에 대나무를 좋아하기 때문에 날아가 버리면 읍이 망하므로 봉이 날아가지 않게 한다는 뜻에서 남쪽 산을 죽방산이라 했고, 또한 봉안 까치의 지저귐을 들으면 이를 잡으려 하기 때문에 다른 하나의 산을 까치산이라 했다.
 
고려와 조선조를 통하여 조운항로중 최대로 험난한 충남 서산군 태안 서쪽의 안흥량(安興梁)은 많은 인명과 조곡이 수장된 곳인데 이 재난을 면할 목적으로 고려시대에 지명을 안흥량이라 했고, 서쪽 지령산에 안파사(安波寺)란 절을 세우기도 했다. 이밖에 도읍마다 비보와 염승이 없는 곳이 없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1198년(고려 신종 1년)에는 최충헌 등이 술사(術士)를 모아 산천비보도감이란 관청까지 설치했다는 점과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과거의 필수과목에는 풍수지리에 관한 것이 14과목이나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의 근대 이전의 도시는 그 입지 선정에서부터 형성과정까지 풍수지리란 입지기준이 그 근간을 이루었고 지금도 우리나라 도시형태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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