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의 국토이야기>‘국토의 대동맥’ 고속도로
<김의원의 국토이야기>‘국토의 대동맥’ 고속도로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6.11.29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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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9 13:58 입력
  
 
김의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5·16 당시까지만 해도 서울∼부산간은 국도도 포장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제2차 5개년 개발계획을 끝낸 정부는 앞으로 다가올 물동량의 수송을 위해서는 새로운 수송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박 대통령에 의한 고속도로 발상은 서독방문 때 결심을 굳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속도로 건설은 종래의 전통적인 철도투자보다 공로(公路) 투자로의 정책전환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속도로를 최초로 착공한 것은 1967년 3월24일의 서울∼인천간 고속도로였다. 이어 4월에는 제6대 대통령선거공약으로 당시 공화당 총재였던 박대통령이 ‘대국토 건설 계획’이란 것을 제시했다. 그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부문이 국가 기간 고속도로망이었다.
 
이어 1967년 11월 7일에는 청와대에서 열린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역사적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결정했다. 이 당시 건설부 장관은 고소도로건설 10개년 계획을 설명했고 1971년까지 서울∼대전 구간을 끝내겠다고 보고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부산까지 끝내시오”라고 지시하는 한편, 건설재원으로써 유류세를 돌려쓰도록 했다. 이리하여 1968년 2월 1일 조국근대화를 상징하는 경부고속도로의 기공식을 가졌다.
 
하지만 이 민족적 대역사는 수많은 비화와 애환을 남겼다. 국가재정이 빈약했던 때이니 만큼 건설비를 둘러싸고 시비가 많았다. 대통령은 나라살림이 어려운 때라 되도록 적은 돈을 들여 건설할 수 있는 방안을 염원하면서 여러 기관에 건설비를 추정해서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건설부 650억원(후에 430억원으로 수정), 재무부 330억원, 서울시 180억원, 육군공병감실 490억원, 현대건설 280억원을 제시했다. 건설비 추계를 놓고 별의별 말이 오갔으나 결국 428억원으로 완공을 보았다.
 
경부고속도로에 대해서는 많은 관료들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고 언론계, 산업계, 국회에 이르기까지 반대일색이었다. 산업계에서는 자기들에게 조세부담이 늘어날 것을 경계했다. 당시 야당에서는 국민경제의 파탄을 내세워 당시 68억달러에 지나지 않았던 “GNP의 막대한 부분을 투자하여 자가용족들의 나들이 도로를 건설해야 하느냐”는 등 철저히 반대했다. 세계은행(IBRD)도 건설비와 관리비 때문에 경제적 파탄이 올 것이라고 했다.
 
경부고속도로는 서울∼부산간의 축선(軸線)을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데 비교노선이 네 가지 있었다.
 
△제1안=서울-대전∼대구∼마산∼부산 △제2안=서울∼대전∼대구∼경주∼울산∼부산 △제3안=서울∼대전∼대구∼밀양∼부산 △제4안=서울∼대전∼대구∼언양∼부산.
 
제1안은 낙동강을 세 번 횡단해야 하는 지형이어서 장대교(長大僑) 가설비가 큰 부담이었고, 제3안은 대구∼밀양 사이의 용문산 준령에 많은 공사비가 예상되었다. 제4안은 가지산 횡단이 문제시되어 결국 제2안을 채택하게 되었다.
 
계획노선 확정에는 각 후보노선을 대상으로 11개 항목에 이르는 기술적 사항과 여섯 가지의 경제성을 중심으로 우열을 가렸다. 구간별 최종 확정일을 보면 서울∼대전간이 1968년 1월 12일, 대구∼부산간은 경주와 언양 경유로 하느냐 밀양 또는 창녕, 마산을 경유하느냐로 의견이 엇갈리다가 4월 25일 경주와 언양 경유로 확정되었다. 노선 확정에 있어 가장 고심한 구간은 대전∼대구간이었다. 이 구간은 교통량이 비교적 적을 뿐만 아니라 지형이 험준하기 때문에 우선 2차선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어쨌든 말이 많던 경부고속도로는 착공한지 2년 5개월만인 1970년 7월 7일에 77명의 희생자를 낸 끝에 준공되었다.
 
경부고속도로의 효과는 첫째로 전국을 1일 생활권화 했다는 사실이다. 왕조시대 12일을 요했던 노정이 단 5시간으로 단축되어 국민의 행동반경을 획기적으로 확대했다. 또한 우리나라 인구의 63%, GNP의 66%, 공업생산액의 81%를 점하는 한강 경제권과 낙동강 경제권을 연결함으로써 국민경제에 막중한 이익을 가져왔다.
 
둘째로 국방상의 효과는 물론이지만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국토 균형발전의 기틀을 잡은 것이다. 이밖에도 오늘날 우리나라 건설업이 중동 등지에 진출할 수 있었던 기술적 토대가 경부고속도로 시공에서 다듬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그 효과는 막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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