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의 국토 이야기>미군정 시대의 국토관리
<김의원의 국토 이야기>미군정 시대의 국토관리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6.11.01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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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1 16:42 입력
  
 
김의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36년간 일본은 대륙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을 개발했다. 이에따라 한국은 부분적이나마 공업화된 셈이었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국토는 타율적으로 분단되었다. 국토의 분단은 경제를 양분하여 국토와 경제구조의 파행성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결국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대혼란을 겪어야 했다.
 
1945년 7월하순부터 9월상순에 이르는 두달 남짓한 기간에 물가는 20∼25배로 폭등했다. 1945년의 쌀 생산량은 1940∼1944년의 5년 평균생산량의 9할에 해당하는 흉작을 기록했다. 정치적, 사회적 대혼란은 별문제라 한다해도 식량부족과 공장가동 위축은 많은 실업자를 배출했다. 의식주라는 국민생활의 기초도 충족치 못했던 상황에서 생산공장마저 제대로 작동되지 못했으니 철도화물 수송량은 1944년 수송실적인 3천102만톤의 1할에도 못미치는 305만톤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1945년 9월15일부터 1948년 8월15일까지 35개월간 실시됐던 주한미군정의 시정목표는 첫째 UN의 회원자격을 구비하여 외국지배에서 독립된 자치주권국가로서 한국정부를 수립할 것, 둘째 중앙정부는 한국 국민의 자유스럽게 표시된 의사를 전적으로 대표할 것, 셋째 민주국가의 필수적인 기반으로서 건전한 경제체제와 적절한 교육제도의 수립을 원조할 것 등이었다.
 
또한 미군정은 ‘점령지역 행정·구호계획’에 따라 시작된 외국원조에 대해서는 경제적 혼란위기에 처한 우리나라를 기아와 질병의 불안으로부터 구제하는데 기본목적을 두고 활용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미군정은 국토관리에 적지않은 비용을 투자했다. 도로공사용 자재대로 248만달러, 철도용 기계 및 자재 구입비로 1천321만달러 등 약 1천569만달러 정도가 투자됐다. 이 금액은 한국이 받았던 원조총액 4억3천392만달러의 3.5%에 해당된다.
 
미군정하에서 국토관리면의 사업을 더듬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해방당시 우리나라 철도의 길이는 6천362㎞였다. 국토분단으로 남한의 철도길이는 41.5%에 해당되는 2천642㎞였다. 군정하에서 철도면에 취해진 첫 조치는 1946년 5월1일자로 일본인 소유였던 철도 중 삼척철도를 제외하고 8개 노선의 사설철도를 국유철도로 흡수한 것이었다.
 
이 조치로 사설철도였던 충북선, 경기선, 충남선, 수여선, 수인선, 토해선, 옹진선, 경춘선이 국유화되었고 그 길이는 566㎞였다.
 
이 당시 철도시설은 일제의 전쟁수행을 위한 과대운전으로 시설이 낡아 사고가 빈발했고 특히 침목 구입이 어려웠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침목 수요가 154만정이었는데 국내 조달능력은 고작 20만정에 불과하여 1947년 4월에는 창동∼일산동 간의 군용선을 철거하여 응급조치 했을 정도였다.
 
또 군정기간중 10.3㎞의 신규 철도건설이 있었는데 제천∼풍기간의 전철공사였다. 이 철도는 1947년 7월에 완공되었다. 이 구간의 공사는 당시 연료 부족현상이 극심하여 태백산 지역의 채탄을 촉진할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해방당시 우리나라 도로연장은 2만5천550㎞였는데 남한에는 63.5%인 1만6천241㎞가 건설돼 있었다.
 
해방후 제한된 예산으로 묵묵히 건설사업을 추진한 부문으로는 농무부의 토지개량사업, 운수부의 철도, 조선전업의 섬진강 발전소 확장공사, 토목부의 도로정비사업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도로는 1945년 10월부터 1천587만원을 투입하여 전국에 걸쳐 노면정리 333㎞, 교량 85개소, 암거(暗渠) 수발(水拔) 등 94개소에 대한 정비를 완료했다.
 
해방후 2대 토목사업이라 일컫는 서울∼강릉간의 이른바 강원도 횡단도로와 서울∼부산간의 국도 보수공사도 이때 착수했다.
 
항만은 해방당시 하역능력이 1천800만톤이었는데 이중 남한이 1천만톤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연간 물동량이 400만톤에 불과한 실정이어서 군정하의 항만은 주요항에 대한 항내 준설사업 정도였다.
 
해방후 35개월간 군정하에서 치수사업도 명맥을 유지하는데 그쳤다. 1945년의 사업을 보면 충남북, 경남북, 전남북 지역에서 7.1㎞의 축제(築堤)와 10개소의 호안(護岸)공사에 그치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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