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의 국토이야기>일제의 시가지 개발 실상
<김의원의 국토이야기>일제의 시가지 개발 실상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6.06.2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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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0 17:43 입력
  
 
김의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한일합병 전 해인 1909년 우리나라 인구는 1천310만명이었다. 인구 1만명 이상의 도읍은 17개였고, 그 인구는 전국 인구의 4.8%인 63만2천명이었다.
 
우리나라의 근대적 도시는 1876년의 개항에 따른 몇몇 개항장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했고, 한일합병을 전후한 철도건설과 관제개편 등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합병에서 1925년까지 15년간 인천 2배, 대구 2.3배, 군산 2.8배, 평양 2.9배, 신의주 5.6배, 목포 6배, 청진 10배 등 7개 도시가 2배이상 커졌다.
 
그후 만주사변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도시화 현상은 크게 발전했다. 해방직전인 1944년 우리나라의 도시인구는 115개의 읍과 부를 합할 경우 600만명으로서 전국인구의 23%로 급상승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나진개발의 긴급성 때문에 1934년에 이른바 ‘조선시가지계획령’이란 것을 만들어 38개 도시에서 본격적인 도시계획사업을 착수하게 됐다.
 
이 가운데 조선총독부는 1935년에 도시계획 결정 순위란 것을 만들었다. 제1순위는 서울, 인천, 대구, 부산, 평양, 함흥이었고 제2순위는 대전, 전주, 군산, 광주, 목포, 해주, 진남포, 신의주, 원산, 흥남 성진이었다. 제3순위는 개성, 청주, 마산, 춘천이었고 제4순위는 기타 중요한 도시로 되어 있었다.
 
이들 38개 도시에 대한 도시계획 결정 내용은 가로, 토지구획정리사업, 주거지역, 공업지역, 운하 등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용도지역제’를 실시한 곳은 나진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압록강 수계의 수력발전이 진척되자 농업국가로 통치하려던 계획을 변경, ‘남농북공’정책으로 전환했다.
 
이 정책에 따라 함흥∼흥남·청진, 평양∼진남포, 신의주∼다사도 등에 대규모 공업단지 건설을 도시계획으로 결정했다. 이들 4대지역은 주로 군수산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고, 그 목적은 만주에 주둔하고 있는 관동군에 대한 군수물자 보급이었다.
 
이밖에 남부지역에 계획했던 공업단지로는 경인지역, 삼척∼묵호, 순천, 대구로 대부분 경공업이었다. 경인공업지역은 시흥, 부천, 김포의 3개군에 걸쳐 약 1천만평을 지정했다.
 
대구공업단지는 섬유공업 중심이었는데 영남일대 농촌에서 밀려오는 실업자 흡수와 관동군에게 공급할 군복지 및 내의 제작이 주임무였다. 오늘날 대구의 섬유공업은 이와같은 일제의 계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우리나라 도시를 개발함에 있어 주로 토지구획 정리사업을 통해 시가지를 형성해 나갔다. 토지구획 정리사업의 뿌리는 멀리 1893년 스위스에서 시작한 것인데, 이것은 공사비 전액을 재정을 지변할 필요없이 현물 즉, 토지로 부담케하기 때문에 관청 입장에서는 재정부담이 줄어드는 한편, 도로와 학교용지, 공원용지 등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다. 또 무질서한 토지의 각 필지를 계획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도시들이 해방 후에도 대부분 이와같은 수법으로 시가지를 조성한 것도 사실이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까지 남북한 22개 도시에 대하여 53지구 61공구에 대한 구획정리사업을 실시했는데 그 면적은 1천900만평에 이른다. 대부분은 해방당시 완성되었으나 공정 40%에서 그친 곳이 서울의 공덕지구가 있고, 50% 공정에서 중단된 곳이 서울 청량리지구와 신당동지구가 있을 따름이다.
 
1934년부터 50년간 이 땅에서 유일한 시가지 조성 수법으로 쓰여 오던 토지구획 정리사업도 토지투기의 제물이 되어 이제는 공영개발수법에 밀려 시가지조성의 주역에서 밀려나는 운명을 걸었다.
 
일제는 우리나라에서 도시계획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의도적인 문화재의 파괴, 일본인에 의한 토지투기 등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그들은 철도역의 입지와 관련시켜 새로운 상가를 독차지하는 한편, 서울에서는 지금의 충무로를 만들어 종로의 기존 상가를 쇠퇴케 하는 등 간악한 수법을 썼으나 유일하게 개성에서만은 일본인 상가 형성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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