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의 국토이야기>조선침략의 첨병 ‘동양척식’
<김의원의 국토이야기>조선침략의 첨병 ‘동양척식’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8.09.10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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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0 10:15 입력
  
김의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일제시대 농사를 지었거나 해방후 건설행정이나 건설업에 종사한 사람으로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회사는 토지가 가장 큰 생산수단이었던 조선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다시말하면 조선침략의 첨병이었고 토지수탁의 하수인이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당시 자본금은 1천만엔이었다. 이중 구한국정부가 출자한 것이 전·답 각 5천700정보였으니까 줄잡아 3천400만평쯤 된다. 이것을 300엔으로 평가하여 주식을 할당했으니까 평당 농지값은 10전도 안된 셈이다.
 
 
일제시대 토지약탈 ‘궁삼면사건’
당시 한국정부가 출자한 농토는 왕실이 소유하고 있던 궁장토(宮庄土)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옥답이었다.
 

1919년에는 자본금을 5천만엔으로 증자했는데 이때는 1910~1918년까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 결과 소유자가 명확치 않은 전·답과 임야 등 20여만 정보의 현물출자로 충당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따지고 보면 자본금의 대부분을 우리가 불입한 일본의 국영기업체인데 이것이 해방 당시 우리나라 남북한 농경지의 10%를 소유한 최대 지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당초 동양척식은 농업, 임업, 축산업, 수산업 등 수지가 안맞는 원시산업을 주축으로 해서 조선의 산업을 일으켜 일본농민을 이민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것을 위한 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일종의 부대사업으로 건축물의 축조매매와 임대를 목적으로 하는 말하자면 부동산업과 금융업까지 업무를 확대했다. 초기에는 업무지역을 조선으로 한정함으로써 본사도 서울에 두고 국내에 9개 출장소를 두었다.
 
동양척식이 36년간 우리나라에서 벌린 착취의 양상을 살펴보면 우선 농지약탈의 대표적 사례로 ‘궁삼면 사건’을 들 수 있다.
 
전남 나주군 궁삼면은 1888년과 1889년에 걸쳐 한발 때문에 수확물이 없어 세금도 물지 못한 상태였다. 재해에 못이겨 많은 농민들이 고향을 떠났으나 남아있는 면민들은 이들 농토를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었는데 全모 金모라는 토지협잡꾼들이 이땅을 한양 관리인 金모에게 몰래 팔아 넘겼다. 이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면민들은 군수에게 소유권 회복을 진정한 결과 일단 소유권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4년후인 1898년당시 한양양반들의 끄나풀인 全모 金모는 다시 공모하여 이번에는 4만5천마지기(약 900만평)의 전답을 경선궁(慶善宮)에 팔아넘겼다.
 
이 사실을 안 동양척식은 회사설립 다음해인 1909년말에 경선궁에 압력을 넣어 단돈 8만엔으로 이 땅을 매수했다. 궁삼면 주민들은 1911년부터 5년간 6회에 걸쳐 법원에 동양척식의 토지매수 무효와 토지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나 농민들은 그때마다 패소를 당하고 말았다.
 
이 문제는 당시 일본까지 소문이 건너가 일본의 여러 사회단체의 간부들이 현지로 건너와 농민들을 돕는 집회까지 열렸다. 이러는 과정에서 농민과 관권 사이에 시비가 끊일 날이 없었고 경찰과의 충돌에서 피차간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이 문제는 수차에 걸친 재판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총독부의 조정으로 1925년에야 해결이 됐다. 그것도 매수원가에 전답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고 양도가격을 공정지가의 두배 가격으로 되돌려 받았다.
 
 
동양척식이 제주에 세운 주정공장
동양척식이 제주에 주정공장을 세운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 공장은 제주도에서 나오는 고구마를 원료로 한 전분공장이었다. 오늘의 제주항은 당초부터 정부가 건설한 것이 아니고 이 주정공장의 사설항만이었다.
 

또한 동양척식은 함경도에 면양(緬羊)목장을 세워 9천632정보에 1만마리의 양을 기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1926년에는 토건회사를 설립했고 31년에는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를 설립해서 신당동에 주택지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보다 거슬러 올라가 1914년에는 남양흥업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920년대에는 강계 수력발전과 부령수력발전소를 건설하기도 했다.
 
36년간 우리나라에서 착취의 선봉장이었던 동양척식은 해방과 더불어 숨을 거두고 유산은 신한공사에 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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