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사 입찰보증금으로 사업비 충당·의존 늘어
표준계약서 마련 동시에 추가적인 제도개선 시급
주민권익 보호차원에서내역입찰방식 적용해야
[하우징헤럴드=문상연 기자] 정부가 정비사업 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 신탁방식 정비사업에 대한 지원책을 대거 풀어내면서 신탁방식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설익은 제도에 대한 개선이 급선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토부가 최근 신탁방식 표준계약서를 만들겠다고 하지만, 이와함께 추가적인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자금조달은 신탁사, 건설사는 단순 도급’. 신탁방식 재개발·재건축사업의 핵심 사업구조다. 하지만 신탁사들이 시공자를 선정하면서 입찰보증금 조건을 당연시 하고 사업비를 시공자 입찰보증금으로 조달하면서 신탁사의 역할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신탁사가 자금조달한다는데 시공자 입찰 시 수백억원 보증금 요구
신탁방식이 도입하면서 기대된 가장 큰 장점은 신탁사의 자금력으로 사업비와 공사비를 조달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사업추진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시공자로부터 사업비를 의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조합은 건설사에게 휘둘리지 않고, 건설사 입장에서는 리스크 없이 단순도급 공사만 할 수 있다.
하지만 신탁방식 도입 7년이 지나고 있지만 입찰보증금 제도로 초기 사업비 조달이라는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 신탁방식을 추진하고 있는 현장들은 조합방식과 마찬가지로 시공자 선정 과정에서 입찰보증금을 받아 이를 사업비 대여금으로 전환해 활용하고 있다. 사업시행자 혹은 조합설립 직후 시공자를 선정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초기 사업비 조달을 신탁사가 아닌 시공자가 담당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신탁방식을 추진하고 있는 정비사업 현장 대부분 시공자 선정 입찰 시 입찰보증금을 요구하고 있다. 그 금액만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을 요구한다. 가로주택 등 소규모정비사업에도 수십억원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2018년부터 신탁사 단독시행방식으로 사업을 추진 중인 신길10구역 재건축사업은 같은 해 4월 시공자를 선정하면서 당시 입찰 공고에서 입찰보증금 50억원을 요구했다.
서울에서 최초로 신탁대행방식으로 재개발사업을 추진한 흑석11구역 재개발사업은 지난 2020년 시공자 선정 당시 입찰보증금 400억원을 납부토록 했다. 대전 장대B구역 재개발사업도 시공자 선정 당시 입찰보증금을 400억원을 요구했다. 지난 2021년 시공자를 선정한 북가좌6구역의 입찰보증금은 500억원이었다.
최근 시공자 선정 절차를 밟고 있는 여의도 한양아파트 재건축사업은 150억원, 경기도 군포시 산본1동1지구는 120억원을 입찰보증금으로 납부토록 했다. 소규모정비사업은 수창동 가로주택 30억원, 인천 부평 동양아파트 20억원, 부산 명장동 가로주택 10억원, 경기도 군포시 당동 741-1번지(10억원)·736-1번지(10억원)·740-2번지(20억원) 등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신탁사들은 하나같이 건설사의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한 장치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입찰에 대한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라기에는 금액이 과도하다는 지적이다.
또한 입찰보증금을 시공자 선정 이후 반환할 수 있는데 대여금으로 전환해 활용하는 것이 시공자로부터 사업비를 의존하는 격이라는 설명이다. 업계에서는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신탁사의 사업비 조달이라는 본래 역할을 살리기 위해 입찰보증금에 대한 기준을 새롭게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신탁방식이 기존 조합과는 다르게 사업비 조달은 신탁사, 건설사는 단순 도급공사만 한다고 했지만, 현재는 입찰보증금을 통해 건설사로부터 초기사업비를 조달하면서 조합방식과 다를 게 없는 방식으로 전락했다”며 “신탁방식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입찰보증금 규모를 최소화하고 선정 후 반환하는 등의 신탁방식에 맞는 입찰보증금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탁사 전문성 살리려면 신탁방식 시공자 선정 기준도 마련해야
신탁방식의 경우 별도의 시공자 선정 기준이 없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서울시가 그토록 고집하고 있는 내역입찰제도가 부작용 없이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방식이 신탁방식이라는 지적이다.
서울시가 사업초기 조합의 자금경색을 외면하면서까지 공공지원제의 내역입찰제도를 도입한 취지는 조합원들의 권익보호였다. 시공자를 사업시행인가 이후 설계도면을 토대로 내역에 따라 선정하면 공사비가 절감되고 향후에 건설사에 휘둘려 공사비 인상을 부추기는 설계변경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조합원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고 이를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서울시는 사업시행인가를 통해 확정된 사업계획 내용으로 내역입찰을 하도록 시공자 선정기준의 원칙은 고집해 왔다. 하지만 조합이 초기사업비 조달 문제로 인해 사업추진에 어려움을 호소하자 최근 시가 조례를 개정해 시공자 선정시기를 앞당겼다.
반면 신탁방식은 신탁사가 초기 사업비조달을 하기 때문에 내역입찰의 문제점이 완벽히 해소된다. 뿐만 아니라 신탁방식의 또 다른 장점인 공사비 절감 효과도 극대화할 수 있다. 이에 업계에서는 신탁방식이야말로 내역입찰제도가 반드시 필요한 사업방식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신탁방식의 경우 2016년 3월 도시정비법 개정으로 도입됐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시공자 선정기준을 마련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도입된 조합·건설업자가 공동시행 협약을 체결하는 ‘공동사업시행’ 방식에서조차 ‘공동사업시행 건설업자 선정기준’을 마련해 건축심의 이후에 시공자를 선정할 수 있도록 한 서울시도 신탁방식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신탁사 단독시행방식의 경우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단이 제한된 만큼 주민들의 권익보호 차원에서 내역입찰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현행 신탁방식에서는 주민들이 시공자 선정 과정에 의견을 반영하는 방법은 총회 결의수단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수없이 복잡다단한 수입 및 비용 항목에 대해 일일이 검토하고 상대측과 의견 차를 좁혀 나가는 계약 협의과정도 신탁사와 건설사간 진행될 뿐 주민들은 배제된다.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