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의 국토이야기>을축년 대홍수와 남대문
<김의원의 국토이야기>을축년 대홍수와 남대문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5.11.10 08: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5-11-10 14:15 입력
  
 
김 의 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우리나라는 유사이래 123회의 대홍수가 기록되고 있다.
1876년 개항이후의 홍수기록을 보면 1885년과 1891년의 낙동강 홍수가 대단히 컸다. 하천에 홍수기록시설을 설치한 후는 1925년의 이른바 을축년의 대홍수가 가장 큰 것이었다.
을축년 대홍수는 여러 가지 면에서 기록할 만한 것이 많다. 강우전선이 7월초순부터 9월초순까지 두달동안 남북으로 이동하면서 전국 하천을 네 번이나 강타하여 일찍이 보지 못한 장마와 대홍수를 초래하였다.
첫 번째는 7월11일에 일어난 대홍수로서 한강이남 지역의 낙동강, 금강, 만경강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 특히, 낙동강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때 한강은 구룡산에서의 수위가 10.57m였다.
두 번째는 7월18일의 한강 대홍수인데, 이때는 16, 17, 18일 3일동안 온 비의 양이 650mm에 달하였다. 이때 한강은 12.74m의 수위를 기록했는데 이때의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을축년 대홍수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강은 한강과 낙동강이다. 다시 말하면 경기도와 경상남도가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다. 이때 서울은 용산에 있는 철도관사(표고 약 23m)의 1층 천장까지 물이 찼는가 하면 뚝섬과 마포지역은 거의 완전 침수상태였다.
한강의 경우 현 수리이론이 살아있는 한 을축년과 같은 대홍수는 영원히 다시 볼 수 없는 것으로 되었다.
당시의 조선총독부 문서와 하천 행정담당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1923년에 낙동강 홍수를 정확히 예보한 우리들은 총독에게 한강수위는 그리 상승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보고당시 이미 뚝섬제방이 무너졌고 김포에서도 제방이 끊어졌기 때문에 수위가 실제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예측은 크게 빗나갔으며 결과적으로 최고수위가 된다는 시간은 반일(半日)이 틀렸고 수위도 예측보다 2m나 높아져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 당시 서울인구는 30만명 정도였는데 이와 같은 대홍수가 된 것은 남한강과 북한강 유역에 큰비가 내렸기 때문이었다.
대개의 경우 한강 홍수는 남한강이나 북한강 어느 한쪽 유역의 강수로 홍수가 발생했는데 을축년에는 두 곳에서 동시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홍수 규모가 커졌던 것이다.
그런데 총독부에서 한강 개수계획을 세웠을 때는 1초당 2만톤의 물을 처리할 수 있게 짜여져 있었다. 이것도 안전치를 고려한 상당히 여유있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을축년 대홍수 때는 한강 인도교에서 1초당 3만2천361톤의 홍수량이었고 팔당에서는 3만7천768톤이었으며 유속 또한 1초당 17m나 되었으니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세 번째 홍수는 8월12일과 13일에 발생한 청천강, 대령강 및 성천강 등이었고 네 번째 홍수는 9월8일에 발생한 호남과 영남에 있는 전 하천의 범람이었다.
네 번째 홍수는 태풍의 여파로 발생한 홍수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큰 홍수였다. 두달 사이에 네차례에 걸쳐 거의 전국 하천을 범람시킨 을축년 대홍수는 인명피해만도 647명에 달하였고 피해액은 1억300만엔이었다.
이 당시(1925년) 조선총독부의 1년 예산이 1억7천800만엔이었으니 한해 살림의 58%에 달하는 실로 놀라운 피해였다. 우리나라 한해의 예산을 약 10조원으로 볼 때 약 5조8천억원의 재산이 단 한해의 홍수 속에 잠겨 떠내려간 셈이 된다. 이 홍수 소식을 들은 일본의 천황이 위문사절로 칙사를 보낼 정도로 대단한 홍수였다.
당시 총독부에 근무하던 가지야마라는 사람은 우리나라 하천의 통계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지야마 공식이란 것을 만들어 냈다. 이 공식의 정식명칭은 <우량과 홍수량 예보에 관한 공식>인데 이것은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쓰이고 있다.
을축년 홍수와 관련해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만한 하나의 과제가 있다. 미처 경험하지 못한 대홍수를 만나 거의 지금의 서울역 부근까지 물이 범람했는데도 남대문은 무사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혹자는 우리 선조들이 미리 알고 남대문을 자리잡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사실여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