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사업 ‘공공관리자’ 독점 논란 확산
정비사업 ‘공공관리자’ 독점 논란 확산
  • 박노창 기자
  • 승인 2009.07.02 0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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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2 08:07 입력
  
시공·설계자 선정 장악… ‘공공 커넥션’ 우려
이주·철거 땐 ‘뒤꽁무니’… 조합에 책임 전가
전문가 “도정법 77조 활용 못하고 권한만 요구”
 

서울시가 내달 1일 주거환경개선정책 자문위원회가 내놓은 ‘정비사업 프로세스 혁신안’을 확정·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가 처음부터 자문위에 동참해왔던 만큼 혁신안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이 혁신안은 공공관리자 도입 등 공공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동안 민간방식에 의존하면서 나타난 업체 선정을 둘러싼 비리나 세입자와의 갈등 등을 풀기 위해 전지전능한 공공이 개입해야 한다는 논리다. ‘민간=악’ ‘공공=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공공은 권한만, 책임은 조합이=공공의 적극적인 개입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민간방식보다 비교 우위를 보여야 된다. 이는 기본전제인 것이다. 특히 공공이 개입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투명성이나 사업의 신속성, 비용절감 등에서 장점이 발휘돼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우선 투명성 부문이다. 지난 10일 대구지법 포항지원은 포항시 전·현직 공무원들이 재건축·재개발 인·허가를 대가로 거액의 뇌물을 받은 것과 관련해 무더기 실형 선고를 내렸고, 지난달에는 서울중앙지검이 서울시 8개 자치구 공무원과 의회 관계자 23명을 기소하는 등 공무원들의 ‘검은 돈잔치’는 계속되고 있다. 신뢰받지 못하는 게 당연한 상황이다.
 
또 인·허가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업이 신속하게 추진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 공공이 사업시행자로 참여하고 있는 안양 덕천마을 등의 사례에서 보면 오히려 민간방식보다 사업이 장기화되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비용절감 측면에서도 저급의 값싼 공공주택만 양산한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도 서울시 혁신안은 공공에게 권한만 부여하고 실제로 공공의 개입이 필요한 부문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또 책임을 회피하는 공공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이에 대한 처벌 규정도 없다.
 

추진위원회 승인 이전에 지정되는 공공관리자는 업체 선정 등 전권을 행사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관리처분이나 이주·철거 등 공공의 중재자 역할이 기대되는 단계에서는 은근 슬쩍 뒤꽁무니를 빼고 있다. 주민의지와 관계없이 강제로 사업파트너가 되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다가도 갈등이 심화되는 단계에서는 주민의 선택사항으로 바뀌게 된다.
 

중재자 역할 보다는 오히려 잿밥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실제 업무 모호… 공공 줄대기 우려도=공공관리자는 설계자나 시공자 선정업무를 지원한다는 명분하에 막강 파워를 가지게 된다. 문제는 공공관리자가 업체 선정과 관련해 어떤 업무를 하겠다는 것인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일례로 업체 선정 총회를 진행하겠다는 것인지, 입찰공고문을 작성하겠다는 것인지 등 불분명하다.
 

또 협력업체의 선정은 이미 법에서 기준이 정해져 있는데도 공공이 개입하게 함으로써 기준 자체를 부정하는 셈이 된다. 〈정비사업의 시공자 선정기준〉 이나 오는 8월 7일 시행 예정으로 국토해양부가 작성중인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 선정기준〉 등이 그것이다. 업체 선정마다 공공관리자의 개입이 이뤄지면서 수주를 위한 업체들의 줄대기도 우려되고 있다. 민간에 맡겨 생긴 비리가 공공으로 넘어가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아가 사업초기 진입장벽에 대한 특혜를 받은 SH공사나 주공 등 공공관리자가 사업시행자 지정 동의서를 징구하는 것도 우려되고 있다. 이럴 경우 공공이 정비사업을 독식하게 된다. 실제로 성남시의 경우 도시·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에 ‘순환정비방식에 의해 정비사업을 시행할 필요가 인정되는 때 주택공사 등을 사업시행자로 지정해 사업을 시행할 수 있다’는 규정을 악용해 전체 사업시행을 주공이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있는 칼’도 못 쓰면서 ‘더 큰 칼 달라’는 꼴=〈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제77조는 업계에서 ‘수퍼 77조’로 통한다. 제77조에 따르면 국토해양부장관, 시·도지사, 시장·군수·구청장은 명령·처분 등에 위반될 경우 그 처분의 취소·변경 또는 정지, 공사의 중지·변경, 임원의 개선권고 등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다.
 

또 국토부장관은 점검반을 구성해 분쟁조정, 위법사항의 시정요구 등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음에도 공공은 인력난과 시간 등을 이유로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다. ‘있는 칼’도 제대로 못 쓰면서 ‘더 큰 칼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한 정비사업 전문가는 “공공개입이 주민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공공이 시행중인 정비사업 현장에서 실제 민간보다 나은 점을 보여주면 된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공공이 민간보다 나은 점을 증명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는 공공시행에 대한 면밀한 실태조사를 실시해 장단점을 파악하는 게 먼저”라며 “이후 시범적으로 운영한 후 제도도입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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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업체, 공공 하수인으로 전락… ‘유명무실’ 불보듯
 

공공관리자가 정비업체의 업무를 대신 수행하게 되면서 정비사업전문관리업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화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또 정비업체를 선정하는 권한을 구청장이 갖게 되면서 정비업체는 공공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현재 선택사항으로 돼 있는 정비업체의 선정이 구청장의 의무사항으로 바뀌게 되면서 ‘공공 줄대기’ 현상도 우려되고 있다.
 

추진위의 기능을 규정하고 있는 〈도정법〉 제14조는 “추진위원회는 다음 각호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여기서 다음 각호는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의 선정 △개략적인 정비사업 시행계획서의 작성 △조합의 설립인가를 받기 위한 준비업무 △그밖에 조합설립의 추진을 위해 필요한 업무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업무 등이다. 다시 말해 임의사항인 것이다. 하지만 혁신안에서는 구청장이 정비구역지정 이전에 선정토록 명시하고 있다.
 

또 지난 2월 6일 개정된 〈도정법〉 제14조제2항은 “추진위원회가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를 선정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시장·군수의 추진위원회 승인을 얻은 후 국토해양부장관이 정하는 경쟁입찰의 방법으로 선정해야 한다”고 돼 있다.
 

이 조항은 올 8월 7일 시행예정인 가운데 현재 국토부가 정비업체 선정기준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다. 시행도 안 해 보고 폐기처리될 상황인 것이다.
 

또 SH공사나 주공 등 공공은 공공관리자인 동시에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가 될 수 있어 민간 보다 먼저 사업에 관여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진다. 그렇기에 공공을 사업시행자로 지정하기 위한 동의서 징구도 우려되고 있다. 일거리가 부족한 공공의 먹거리를 위해 공공개입을 유도한다는 지적도 그래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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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초기자금 지원, 원금에 이자까지 상환
 

■ 핫이슈 점검
공공의 초기자금 지원은 무상지원이 아닌 원금에 이자까지 갚아야 하는 대여금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공공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한 여론호도용 술책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실제 사업성이 떨어지는 지방에서는 지원금액 여부를 묻는 민원이 폭주해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우선 혁신안에 따르면 구청장은 예정구역이 지정되면 정비업체를 선정하고, SH공사나 주공 등을 공공관리자로 지정하게 된다. 이때 선정된 정비업체나 공공관리자의 용역비는 공공이 부담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용은 대여금으로 향후 이자까지 감안해 반환해야 하는 금액이다. 지난 1월 15일 자문위 1차 방안에 따르면 공공지원의 융자확대 방안을 언급하면서 연 6%의 이율로 회수하는 것으로 명시돼 있다. 당시 자문위는 3년간 매년 4천50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문제는 도시·주거환경정비기금이 풍족한 서울과 달리 지방 대부분의 경우 적립기금 실적이 미미하다는 점이다. 결국 지원하려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아가 서민들의 주거복지 등이 아닌 개발을 위해 국민혈세를 투입해야 한다는 점에서 명분도 없는 형국이다.
 
▲총회 직접참석비율 상향=지난 5월 27일 개정된 〈도정법〉 제24조제5항은 “총회의 소집절차·시기 및 의결방법 등에 관하여는 정관으로 정한다. 다만, 총회에서 의결을 하는 경우 조합원의 100분의 10 이상이 직접 출석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오는 11월 28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바뀐지 불과 1달도 되지 않아 다시 비율을 조정하자는 것이다.
 
한 정비사업 전문가는 “서면결의도 엄연한 의사표시의 방법 중 하나라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이미 이주가 완료된 단지의 경우 직접참석 비율을 높일 경우 총회의 성사여부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전자투표제도 시스템 도입과 관련한 비용이나, 자치구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총회가 열릴 경우 등 세세한 부분까지도 미리 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비사업비 산정프로그램 개발=최근 조합설립 무효 소송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가장 큰 이슈는 비용부담의 구체성이다. 조합 입장에서는 법대로 해도 패소하고 있는 상황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고, 일반 주민들은 비용부담을 확실히 알지 못해 사업에 불확실성을 갖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조합이 동의서를 걷을 때 비용부담에 관한 사항을 구체적으로 결정짓지 못하는 이유는 정비사업이 갖는 특수성 때문이다. 수입과 지출이 모두 추정치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공공이 한다고 사업특성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공공이 하더라도 패소 판결이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별도의 법적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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