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 보호대책 ‘이상한 처방전’
세입자 보호대책 ‘이상한 처방전’
  • 박노창 기자
  • 승인 2009.04.22 0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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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2 06:29 입력
  
지자체가 감평·회계감사기관 선정… ‘관치’ 논란
시장·군수가 뽑고 비용은 조합에 전가될 듯
‘특정업체 밀어주기’ 의혹 우려… 민원 불가피
 
 

 

“감기에 걸리면 내과에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정부는 산부인과에 가라고 합니다. 애를 낳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물론 산부인과 의사가 일반인 보다야 낫겠지요. 하지만 의사 면허 있다고 똑같은 의사가 아니잖습니까? 전문의가 왜 있냐구요. 세입자 보호대책을 담은 개정안을 두고 지금 딱 그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용산참사 이후 세입자 보호대책을 담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개정안이 지난 2일 김성태 국회의원에 의해 대표발의됐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냉정하다 못해 냉담하다. 실효성이 없거나 남의 다리를 긁는 식의 이상한 처방전을 내렸다는 데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상황이다. 김 의원은 용산참사 이후 재개발 세입자 보호대책을 논의하던 공식기구인 ‘재개발 제도개선 당정T/F’ 간사로 활동해왔기 때문에 이번 개정안은 정부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로써 이번 개정안은 전문가들로부터 사실상 낙제점을 받은 셈이다.
 

▲시장·군수 추천 아닌 직접 선정=현행 〈도정법〉 제48조제1항에 따르면 재개발의 경우 종전·종후자산 평가때 시장·군수가 추천하는 감정평가업자 2인 이상이 평가한 금액을 산술평균하도록 돼 있다. 도시환경정비사업의 경우에도 〈도정법〉 시행령 제52조제1항제7호에 따라 재개발 규정을 준용토록 돼 있다.
 

또 회계감사는 △추진위원회에서 조합으로 인계되기 전 7일 이내 △사업시행인가의 고시일부터 20일 이내 △준공인가의 신청일부터 7일 이내 등 세차례에 걸쳐 받도록 돼 있는데 회계기관 선정에 별도의 규정은 없다.
 

하지만 앞으로는 감정평가업자나 회계감사기관을 지자체가 직접 선정하게 된다. 감정평가나 회계감사에 시장·군수가 직접 개입함으로써 민간자율에 맡겨지면서 나타난 분쟁을 예방하겠다는 취지다.
 

개정안 제48조제5항은 “주택재개발사업 및 도시환경정비사업에서 제1항제3호(분양대상자별 분양예정인 대지 또는 건축물의 추산액), 제4호(분양대상자별 종전의 토지 또는 건축물의 명세 및 사업시행인가의 고시가 있은 날을 기준으로 한 가격) 및 제6호의2(세입자별 손실보상을 위한 명세 및 그 평가액)에 따라 권리를 평가할 때는 다음 각호의 방법에 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다음 각 호는 “시장·군수가 선정한 〈부동산가격 공시 및 감정평가에 관한 법률〉에 따른 감정평가업자 2인 이상이 평가한 금액을 산술평균하여 산정한다. 다만, 관리처분계획을 변경·중지 또는 폐지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분양예정인 대지 또는 건축물의 추산액과 종전의 토지 또는 건축물의 가격은 사업시행자 및 토지등소유자 전원이 합의하여 이를 산정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또 개정안 제76조제2항은 “제1항에 따라 회계감사가 필요한 경우 사업시행자는 시장·군수에게 회계감사기관의 선정을 요청하여야 하며, 요청이 있는 경우 시장·군수는 즉시 회계감사기관을 선정하여 회계감사가 이루어지도록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3항은 “제2항에 따라 회계감사기관을 선정한 경우 시장·군수는 공정한 회계감사를 위하여 선정된 회계감사기관을 감독하여야 하며, 필요한 처분이나 조치를 명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권한은 지자체가, 비용부담은 조합이=문제는 이 조항들이 선정 이후의 법률관계가 불명확해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비용부담의 주체가 모호하다. 일반 상식으로는 업체를 선정한 당사자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감정평가나 회계감사기관을 선정한 지자체가 비용을 내야 하는게 당연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비용은 조합에 전가될 게 뻔하다. 어차피 조합원들의 재산을 감정평가하는 것이고, 시장·군수가 비용을 낼만한 여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지자체는 권한만 쥐고, 책임은 조합에게 전가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조합 입장에서는 자신의 재산이 걸린 문제인데도 의사결정에서 배제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지난 15일 열린 국토해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임병규 수석전문위원도 이 부분을 지적했다.
 

임 수석전문위원은 “시장·군수로 하여금 직접 계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체결 이후에 조합 등에게 제반비용을 청구할 수 있는 내용을 추가적으로 규정할 필요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순번대로 나눠먹기 폐해도=또 지자체가 감정평가나 회계감사기관을 어떤 기준으로 선정할 것인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감정평가사나 회계사라고 해도 재개발 분야에 대한 경험과 노하우가 없다면 오히려 조합이 직접 선정하는 방식보다 나을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관련 실적이나 인력 등으로 제한을 둔다면 자칫 ‘특정업체 밀어주기’라는 의혹을 살 수도 있다.
 

결국 지자체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해봐야 등록된 감정평가사나 회계사 등을 놓고 순번대로 정하는 방식이다. 의사면 다 같은 의사냐는 불만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감기 걸렸는데 산부인과 의사 걸리지 말라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다.
 

▲민원엔 ‘나 몰라라’ 뒷짐=감정평가나 회계감사에 불만이 생길 경우 그에 대한 민원을 누가 책임지느냐도 문제다.
 

일단 지자체가 모든 책임을 조합에게 떠넘길 것은 뻔하다. 일례로 감정평가액에 대한 불만이 있다면 민원해결을 조합이 져야 하는 것인지, 지자체가 져야 하는 것인지, 감정평가사가 져야 하는 것인지 불분명한 상황이다.
 

한편 지난 15일 국토해양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고 김 의원이 대표발의한 개정안을 비롯한 6개의 〈도정법〉 개정안을 21일 제2차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심사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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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평가사·회계사들, 공인 자격 의심 ‘불쾌’
 

■ 업계 반응
감정평가사와 회계사들은 국가의 공인된 자격을 의심하는 정부의 현재 인식에 대해 상당히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또 조합이 선정하면 양심을 속여 평가나 감사업무에 임하고, 시장·군수가 선정하면 그렇지 않다는 이분법적 사고에도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다.
 

한 감정평가사는 “감정평가사나 회계사는 국가로부터 자격을 얻은 공인”이라며 “마치 조합과 짜고 불법을 저지르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어 상당히 불쾌하다”고 말했다. 이어 “공공은 절대선이고 만능키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며 “나아가 선정권한만 공공이 갖는다면 사유재산권 침해 논란도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한 회계사도 “회계감사 수수료가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아 봐야 1~2천만원 수준”이라며 “그 정도 금액 때문에 자신의 업을 담보로 내걸겠냐”고 반문했다. 이어 “업체 선정권한이 지자체로 넘어가게 되면 공무원들의 비리가 오히려 늘어날 것”이라며 “이같은 조치는 간섭이고 규제”라고 비판했다.
 
사실 세입자의 보상평가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세입자가 원하는 수준의 보상평가가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세입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감정평가사가 평가를 실시하면 의외로 문제는 간단해진다.
 

실제로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도 이같은 사항이 존재한다. 〈공익보상법〉 제68조제1항은 “사업시행자는 토지등에 대한 보상액을 산정하려는 경우에는 감정평가업자 2인 이상에게 토지등의 평가를 의뢰하여야 한다. 다만, 사업시행자가 국토해양부령이 정하는 기준에 따라 직접 보상액을 산정할 수 있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제2항은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감정평가업자를 선정함에 있어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토지소유자가 요청하는 경우 제1항의 규정에 의한 감정평가업자 외에 토지소유자가 추천하는 감정평가업자 1인을 선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같은 식으로 대입하면 재개발 세입자가 추천하는 감정평가사를 추가로 선정하고 조합이 선정한 감정평가사가 산출한 금액의 산술평균 금액으로 보상액을 결정하면 된다는 얘기다.
 
또 조합의 비리를 감사하기 위해서는 회계나 장부와 관련된 외부감사 보다는 업무에 대한 내부감사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재 2~3명으로 구성되는 감사를 더욱 늘리거나 감사위원회를 구성하는 방안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시·군·구에 설치해야 하는 분쟁조정위원회를 두고도 말이 많다. 전국적으로 230여개에 달하는 지자체에 전부 설치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에 대한 원론적인 문제에서부터 분쟁위의 조정 효력이 당사자간 합의를 의제하는 이외에 법적 구속력을 인정하기에 미흡한 점, 분쟁위의 구색맞추기식 위원 구성 등을 두고 여전히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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