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우소이야기>그 슬픈 정조대(14)
<해우소이야기>그 슬픈 정조대(14)
  • 하우징헤럴드
  • 승인 2008.01.23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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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3 15:58 입력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고통을 여러분들은 한번쯤 경험해 보았으리라. 그러나 그 고통이 장시간 지속된다면 어떨까? 아마도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화장실 출입이 장시간 어려웠던 경우가 있었으니 그 예가 바로 정조대이다. 알다시피 중세 유럽에서는 십자군의 원정이 유행이었다. 회교도를 몰아내고 성지를 수복하겠다는 명목으로 유럽의 군대가 서아시아로 원정을 갔던 것이다.
 
인간사가 그렇듯이 이 숭고한 이념 아래서도 인간적인 고민은 남는 것.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사나이들의 고민은 자기가 살아남을까 보다는 그 동안에 아내가 정조를 지킬 수 있을까였다. 그래서 십자군 참전 용사들은 졸렬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자기가 집을 비운 동안 아내가 절대 바람을 피우지 못하도록 고안한 장치, 바로 정조대였다. 가죽이나 철제로 만들어진 이 장치를 두고 그들은 꽤나 즐거워했으리라.
 
정조대는 열쇠 장치가 달린 가리개 모양인데 그 열쇠는 전장에서 잃어버리면 큰일이므로 절친한 친구나 친지에게 맡겼다. 그러나 사실 그 믿었던 친구들이 십자군 용사의 아내를 유혹하는 경우, 혹은 그 반대의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이것을 만들어낸 사람은 질투가 유난히 많았던 12세기 이탈리아 사람이며, 13세기에는 프랑스까지도 건너가 유행했다고 한다. 정조대는 십자군 원정이 끝나고도 계속 유행되어 15∼16세기의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애용되었다.
 
정조대란 가죽이나 강철로 만들어진 콜셋으로 일종의 기저귀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성기나 항문 부분에 조그마한 구멍 2개가 뚫려 있을 뿐이어서 대·소변으로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더군다나 그 구멍에는 쇠못이 박혀 있어 손가락 하나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요즘의 상식으로는 어떻게 그런 부당한 일들을 견딜 수 있었는지 역겨울 정도이지만 건강을 이유로 목욕을 금기시하던 때이므로 대충 이해가 됐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오물이 쌓인 이 정조대 때문에 성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는 귀부인들이 속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16세기 한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브랭톰이 그의 회상록 ‘호색여결전’에 기록한 것을 보면 정조대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프랑스 파리에서 매년 열리는 샹제르만 장터. 어느 부유한 상인이 정조대를 팔려고 이 장터에 나섰다. 질투심이 많은 남자들이 너도나도 정조대를 구입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들의 부인들과 정부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몇 명의 귀부인들이 그 상인을 찾아와 이렇게 협박했다고 한다.
 
“이런 잔인한 물건을 다시 한번 장터에 내다 팔면 그때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꺼야!”
 
그래도 정조대는 여전히 질투심 많은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긴 여행이 잦은 상인들도 집을 비우는 동안 아내에게 이것을 착용시켰다.
 
정조대가 유럽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자료제공 : 브리앙산업  www.bri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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